미세먼지 가득했던 월요일 오전,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단어 중 눈에 띄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공무원 기숙학원’
종종 즐겨보곤 하는 KBS <다큐멘터리 3일>에서 공무원 기숙학원에서 청춘을 반납하고 공부하는 2030대 젊은 수험생들의 3일을 보여준 모양이었다. 나 역시 한 때 대학동 고시촌에서 시험공부를 했던지라 나이 어린 수험생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늘 애정과 연민이 솟아난다. 결국 퇴근 후 그 다큐멘터리를 남편과 시청했다. 그 중 공무원 기숙학원에서는 ‘4무’ 정책을 시행한다고 했다.
금지하는 항목은 게임, 핸드폰, 음주 그리고 이성교제.
KBS<다큐멘터리 3일> -'봄을 기다리며 공무원 기숙학원 72시간' 중
그걸 보자마자 남편과 나는 동시에 비집고 나오는 웃음 섞인 외마디 비명을 참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편과 내가 만난 곳이 대학동 고시촌이고, 우린 거기에서 만나 연애를 했고, 준비하던 같은 시험에서 둘 다 순리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를 놓고 보자면 4무정책, 그 중에서 이성교제 금지는 시험 합격에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 맞다. (시험 합격이 정말 간절하다면 이성의 접근만은 절대로 허용하면 안 된다!)
KBS<다큐멘터리 3일> -'봄을 기다리며 공무원 기숙학원 72시간' 중
일생일대 중요한 시험에서 고작 연애질이나 하다가 떨어진 그 커플의 향후 행방은 어땠을까.
둘 다 갈 곳 없는 백수가 되었다. 엄밀히 말해 백수가 된 것은 아니고 백수 신분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필 그 시기에 사귀고 나서 나의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둘 다 돈도 없고 심적인 여유도 크지 않으니 특별하게 기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3주 뒤, 결국 수중에 가진 돈을 최대한 끌어 모아 운동화를 사서 직접 신겨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공부를 일 년 더 해서 나중에 크게 나를 호강시켜 줘야한다는 생각보다는 무엇이든 적시에 내가 필요한 것을 해주고 싶단 마음에 당장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단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는 대기업의 계약직으로 취직을 했다.
그가 더 이상 수험에 뛰어들지 않은 이유는 수험기간동안 공부는 자신의 적성에 영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당락으로 결과가 좌우되는 수험생활은 나를 질리게 만들었지만 공부하는 과정은 그리 괴롭지만은 않았다. 수험은 접는 대신 학문을 하기로 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해서 합격했다. 수험생활에 드는 비용도 내가 번 돈으로 충당했었기에 대학원 진학 역시 나의 선택이니 내가 번 돈으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대학원 공부와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마침 내가 공부한 지식이 필요한 자리를 찾게 되었다. 나처럼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컨설팅 회사에서 소소하게 돈을 벌며 공부에 필요한 시간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백수 신분에서 만나 서로 발맞추어 조금씩 성장해갔다.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험 불합격을 경험하여 열패감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작은 것이라도 하나씩 성취하는 기쁨을 누려보자 약속했다. 기업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남편은 해당 기업의 대졸 공채를 꾸준히 준비하여 이듬해 합격 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규모가 작은 컨설팅 사무실에서 내가 공부한 지식을 남들에게 제공하며 사무실의 덩치를 조금씩 불려감과 동시에 나도 발전해가는 보람을 느꼈다. 더불어 업무와 관련된 학문을 대학원에서 공부 하니 비로소 공부의 감칠맛도 알아갔다.
수험을 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당시 나의 본격적인 삶은 시작되지 않았다 생각했다. 주머니도 가난하지만 자아도 빈곤했을 때였으며 심적으로 어떤 여유를 쉽게 가지기 힘든 때였다. 소설로 치자면 프롤로그에서조차 언급될 수 없는 단계라 생각했다. 일 년 중 시험 당일과 합격자 발표의 날, 단 이틀이 아니라면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하는 일상에서 무엇을 언급할 내용도 거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무관하게 그럼에도 내 삶은 한 번도 쉰 적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잠잠한 수험생활 그 안에서도 흥미로운 학문을 알아갔으며 그 때에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종국에는 결혼했다. 나는 2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수험에 실패했다. 하지만 무슨 주제이든 그 시간을 빼 놓고 결코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그를 외면하고 열심히 공부하였더라면 시험에 합격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내가 계획하고 원하던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성장단계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와 묵묵히 기다릴 수 있는 인내, 소소한 성취의 기쁨, 그 과거를 하나씩 반추할 수 있는 추억, 그 안에서 견고하게 쌓아올린 신뢰는 과연 무엇으로 얻을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이것이 현재의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볼품없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시간들도 결국 내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오늘도 내 생은 뚜벅뚜벅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생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과거의 나의 시각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이 훗날 보이기도 하고, 과거의 시간을 모아 이것을 어떻게 쓰느냐를 두고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놓이기도 한다.
하여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라 생각하니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을지 모르는 나의 오늘을 그저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