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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May 19. 2023

내 나이 서른세 살에 할머니 소리를 듣다니

그것도 삼신할머니라니?

 ‘현주야, 넌 내 삼신할매야!’      


 내 나이 서른셋에 할머니 소리를 듣다니. 그것도 나보다 먼저 태어난 (아영이는 나보다 생일이 빠르다.) 친구한테, 그냥 할머니도 아닌 삼신할매 소리를 듣다니. 우리 모태솔로 아영이의 소개팅이 도대체 어땠길래 나한테 삼신할매라는 말까지 붙이는 걸까?


 개인적으로 삼신할매라는 단어 자체를 들은 것이 오랜만이었다. 삼신할매는 출산이나 육아와 관련된 집안의 신 같은 존재다. 육아나 출산이 있기 전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과정 중 하나는 '누군가와 커플이 되는 것'일 테고, 아영이가 나에게 삼신할매라고 비유한 것을 보면 소개팅남과 첫 만남이 꽤 괜찮았던 것 같았다.


 - 야, 어땠어? 

아영 - 넌 내 삼신할매야.

- 아니, 그러니까 어땠냐고? 좋았다는 거지? 뭐야?

아영 - 응. 너무 좋았어. 엄청 떨리고 엄청 좋았어.


 아영이는 무척 들떠 보였다. 몇 년 전 아영이가 첫 번째 소개팅을 했을 때는 어땠더라? 소개팅이 끝난 후 아영이는 뭔가 체념한듯 약간 차분하고 오히려 좀 축 처진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 소개팅은 뭔가 달랐다. 느낌이 좋다. 오랜 시간 아영이와 친구로 지내면서 이렇게 흥분한 아영이를 몇 번이나 봤을까?


나 - 그래도 잘 된 거지? 맞아? 야, 좀 자세히 얘기해 봐.

아영 - 소개팅 끝나고 또 만나기로 약속한 거 정도면 잘 된 거 맞지? 

- 애프터? 


 아영이와 소개팅남(김지훈)의 첫 만남은 꽤 괜찮았다. 서로 이성을 만난 경험이 많지 않아 대화가 원활하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기를 쓰고 대화 주제를 짜내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하면 또다시 새로운 질문을 생각하는 시간이 이어졌단다. 


 들뜬 아영이는 내가 알던 아영이 같지 않았다.

 "현주야, 근데 소개팅하니까 설레긴 설레더라. 걔가 말이 별로 없어서 나도 진짜 계속 질문하고 대화 주제 계속 생각했어. 나 그런 거 못하는 거 알지? 근데 막 머리 굴리면서 뭐 말할지 생각하게 되더라? 난 내가 그런 거 못하는 줄 알았어. 어색하긴 한데 기분 좋더라."


 아영이는 오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 아영이가 다른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 계속 질문을 하고 생각했다는 건 나에게 너무 낯선 일이었다. 아영이에게 소개팅 시간이 어색하긴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처럼, 나에게 아영이의 이런 모습도 어색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 근데 그렇게 질문 생각하는 거 힘들진 않았어?

아영 - 엄청 힘들었어. 진짜 엄청 힘들었어. 그 사람이 대답하고 있는 동안 계속 다음 질문 생각했어.

 - 그런데도 좋아?

아영 - 응. 은근히 엄청 귀여운 타입인 것 같아. 근데 소개팅하고 한 번 만난 다음에는 계속 연락해도 괜찮은 거야?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 응. 이제 한 번 만났으면 편하게 연락해도 괜찮아. 


 사실 내가 말하는 게 소개팅의 국룰 같은 건 아니지만,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었으면 이제 편하게 연락쯤은 괜찮을 테니. 아영이는 소개팅을 하고 소개팅남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조잘거렸다. 키가 작아도 그게 귀여운 것 같다, 방탈출 게임을 좋아하는데 같이 해보면 좋을 거 같다...


 귀엽다고? 아마 다들 이런 말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 같다. '귀여우면 끝났다.'는 말.

 아영이가 누굴 귀엽다고 말한다고? 이렇게 흥분한다고?


 - 아영아, 너 그 사람이 니 남자친구여도 괜찮을 것 같아? 

아영 - 남자친구?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근데 이 사람이 남자친구가 되어도 괜찮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그래. 처음에는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는데, 바로.


 - 그럼 상상해 봐. 걔랑 뽀뽀할 수 있어?

아영 - 뽀뽀? 쌉가능!


 쌉가능이라는 단어를 글로 쓰기는 좀 어색하지만, 아영이의 대답을 정말 그대로 옮기고 싶었다. 아영이랑 뽀뽀라는 단어에 대해 말해보는 것도, 뽀뽀에 대해서 ‘쌉가능’이라는 대답을 내놓는 것도 모두 어색하면서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단 한 번의 만남 이후 아영은 눈에 띄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말 내가 알던 아영이가 아니었다. 


 ‘나 진짜 운동 열심히 해서 살도 쫙 한 번 빼 볼래.’

     

 난 내심 아영의 소개팅남이 나처럼 외향적이고 대화에 있어서 적극적인 사람이기를 바랐다. 아영이 연애에 대한 경험도 적고(아니 사실 없고) 내향적인 편이었기 때문에. 그래야만 두 사람이 잘 맞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래야만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영은, 소개팅남 지훈님과 별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설레고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래. 누가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덕분에 나도 별 얘기도 아닌 것에 설레고 좋아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설레는 감정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더 큰 자극이 있어야만 설렘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 오기 마련이다. 지금은 아영이가 별 얘기 하지 않아도 설레는 순간을 즐기길 바랐다. 


 어쨌든, 소개팅 날의 아영은 내가 알던 아영이 아니었다. 

 이런 아영이의 모습을 알게 된 대가로 서른세살에 삼신할매 소리를 듣는 것은 참 괜찮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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