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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Feb 10. 2020

서울에서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카페를 알고 있다는 것

_명륜동, 학림


서울은 변화에 안달이 난 도시 같다. 건물은 빨리 헐리고 거리는 자주 바뀐다. 여행의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도시들도 다 그렇다’고 한다면 반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목도한 십 수 년 간의 서울은 그렇다. 

홍대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데도 완전히 다른 세상의 분위기를 풍기던 연남동을 기억한다. 경의선 숲길 조성 전의 연남동. 지금은 ‘연트럴파크’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그곳이다. 오래된 시장, 휑뎅한 공터 주변에 한둘 있던 작고도 유니크한 술집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질적인 것들이 이루는 조화가 참 근사한 곳이었다. 근래에 연남동은 서울에서 땅값이 부지기수로 솟은 동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종로 1가 방면 입구 맞은편에 있던 참새집을 기억한다. 겨울이면 거기서 따뜻하게 데운 정종과 은행꼬치를 먹었다. 참새집이 있던 피맛골은 철거된 지가 벌써 칠 년째다. 피맛골에 모여 있던 노포老鋪들은 인근의 신식 복합 건물로 이전했다. 서울에서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상점을 만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서울은 길들지 않은 것을, 갓 바른 페인트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시이다. 


학림에 대해 쓰고 싶어 이 글을 푸념으로 시작했다. 종로구 명륜4가 – 보통 ‘대학로’라 하는 –에 위치한 학림은 올해로 60년이 된 다방이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으로 연결된 복층의 구조와 온종일 클래식을 틀어주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지는 않은 곳이다. 관엽식물이나 마블 테이블로 꾸며지거나 회벽이 노출된 인더스트리얼 무드의 카페, 커피숍이 요즘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학림은 ‘다방’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수 없는 인테리어를 갖췄다. 

나들이객이 북적이는 봄이고, 장맛비가 쏟아지는 한여름이고, 마로니에가 노랗게 물든 가을이고 간에, 이 공간은 어느 계절이든 겨울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둑신한 조명과 북유럽의 페치카와 어울릴 법한 목조 가구의 색조 탓이 크다. 출입구의 좁은 계단을 올라 드디어 출입문 앞에 당도하면 숨을 한 번 고르고 실내로 들어서는데, 바로 이 순간이 의외의 설렘을 준다. 나는 이 때 잠시 상황극을 벌인다. 나는 비밀스런 과거를 안고 홀로 추위와 강바람에 맞서는 통에 영육이 지쳐버린 나그네다, 비정한 거리를 떠돌다가 우연히 이 안식처를 발견한 것이다! 학림에 들어설 때면 습관처럼 이런 연기를 하게 된다. 

내가 특히 이곳을 좋아했던 이유는 손님이 들어올 적마다 무시로 딸랑이는 출입문의 종소리 때문이다. 고요함을 깨는 종소리가 거슬릴 때도 있지만 종이 울림과 동시에 반가운 얼굴이 함께 들어선 적이 자주 있었다. 동행 없이 혼자인 날은 우연한 만남이, 약속 장소가 학림인 날은 예정된 만남이 늘 흐뭇했기에 출입문의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음이 들떴다.


이 년 만에 학림을 방문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발길이 뜸했는데, 문득 학림이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해가 저무는 때인 만큼 추억의 장소에서 조촐하게 셀프 망년회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평일 저녁의 디저트 타임을 꽤 지난 시간인데도 만석이다. 당황스러웠다. 가까스로 자리가 났지만 영 눈치가 보인다. 여럿이 온 손님이 대부분이어서 일인분의 자리만 차지해야 하는 나로서는 미안할 뿐이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릴 상황. 딱 한 번만 무렴해 보기로 했다. 

한방차 한잔을 주문하고 노트북의 모니터로 바로 시선을 떨구었는데 서버가 가지 않고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두 눈만 꿈벅이는 내게, 카운터 앞에서 선불이라고 한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만 학림에 와 두 번째로 낯선 일이기는 하다. 여느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처럼 학림도 선불 결제의 대세를 따르나 보다.(첫 번째로 낯설었던 일은 실내금연법 시행으로 전석 금연이 시행되었던 날이었다.)

사람들의 떠들썩함은 참을 만했지만 이따금 팡팡 터지는 플래시 불빛이 영 신경 쓰였다. 몇 년 전의 학림은  레귤러 한 잔을 시켜놓고 김승옥의 단편을 읽다가 휴지조각에 낙서를 끼적대다보면 두 세 시간이 훌쩍 넘어있던 곳이었다. 내 방 침대만큼이나 활자가 잘 읽히는 곳, 글줄이 잘 쓰여지는 곳이었다. 늘 그렇게 머물다 간 곳이었다. 

한방차를 반 정도 남긴 채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내가 모르던 새에 이곳은 ‘도민준’의 추억 속 찻집이 되었다. 주말 다큐멘터리에도, 아침정보방송에도 기 십 번을 나와 서울의 명소로 공인되었다. 학림의 유구한 세월을 다 모르지만 내 기억의 학림과 오늘의 학림이 다르다는 점만 알겠다. 예전처럼 머물다 가기에는 어려운 곳이 되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와 출입구에서 잠깐 멈춰 섰다. 평일 밤이라 마로니에에 인적이 많지는 않다. 사람들은 학림에서 여전히 약속을 잡고, 어떤 이는 좋았던 시절을 추억할 것이다. 다만 나는 당분간 여기에 올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스무 살 언저리의 나에게 인큐베이터같았던 학림. 아쉽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서글프지 않다. 시시각각 변하기 좋아하는 도시에서, 같은 자리에 버티고 있는 오래된 다방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묘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학림에선 커피 말고 술도 판다. 재미있는 메뉴는 크림치즈케익과 팥스무디. 케익인지 푸딩인지 모호한 식감의 크림치즈케익은 따뜻하고 쓴 커피와 궁합이 잘 맞는다. 상큼한 잼이 딸려 나오는 점도 포인트. 팥스무디는 팥성애자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메뉴이다. 호불호가 강하다는 점이 이 메뉴의 매력적인 부분. 공산품 통조림 팥도 좋아하는 나는 ‘육천원이나 내고 녹인 비비빅을 왜 먹느냐’는 타박을 들어본 적이 있다.


2016.12.29.  



학림

02-742-2877

서울 종로구 대학로 119 2층 학림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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