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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Nov 29. 2020

내 영혼의 카레

_‘카레’라고 이름이 붙은 모든 형태의 음식을 좋아한다.


‘카레curry’라고 이름이 붙은 모든 형태의 음식을 좋아한다. 커민이 잔뜩 들어간 버터 치킨 커리에, 커다란 난을 죽 찢어서 찍어 먹는 것도 좋고, 어릴 적 엄마가 한 솥 가득 끓여 주던 바몬드 카레도 좋아한다. 나는 큼직하게 깍둑썰기한 감자와 소고기만 몰래몰래 건져 먹기를 좋아했다. 고소한 게의 살을 껍질째 아드득 씹어 먹고, 짭짤하고 되직한 커리는 밥에 조금씩 적셔 먹는 푸팟퐁 커리도 빼놓을 수 없다.

저마다 특색 있는 세상의 모든 따뜻한 카레를 사랑하지만, 낮에는 은행잎 같은 볕이 쏟아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공기가 감도는 요즘과 같은 때에는 동교동 <로야토야>의 매운 카레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첫 직장의 사무실 근처에 있던 작은 일본 가정식당의 메뉴였다.     


문정 씨는 ‘사회’에서 알게 된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다. 내 첫 회사는 지금은 없어진 작은 출판 기획사였는데 그 곳에서 만난 입사 동기였다. 주로 메이저 출판사의 외주 업무를 맡았던 터라 일감이 몰리는 때와 그렇지 않은 때가 갈렸다. 떠올리면, 아주 바빴던 한 달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회사까지의 교통비가 아까울 만큼 한가한 편이었다. 횟집 수족관처럼 좁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제일 난처한 일은 화장실 사용이었다. 작은 사무실 안에 화장실이 딸린 구조라서 민망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았다. 배에 힘을 잔뜩 주고서 천천히 일을 치를 때가 많았다. 화장실의 불편함을 문정 씨에게 토로하면서 우리는 가까워졌다.      

사무실 주변의 식당이라는 식당은 모두 섭렵한 듯했다. 국적과 메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식당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주로 간 곳은 사무실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고 메뉴도 가장 다양한 <로야토야>였다. 정식부터 덮밥, 사시미류까지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나는 메뉴를 고를 때 항상 고민하다가 결국 매운 카레를 시켰다.      


점심을 먹고서는 회사 근처를 산책하다가 사무실로 복귀하는 때가 많았다. 불을 켠 듯 노란 은행나무 아래를 걸으며 문정 씨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드숍 화장품 가게에서 정기 세일을 하고 있으니 퇴근길에 같이 들러 보자는 제안부터 봉급을 어떻게 쪼개어 생활하고 있는지, 저축의 비율은 어떻게 잡고 있는지, 남자친구와는 잘 만나고 있는지 등. 둘 다 당시에 꽤 오래 교제하던 남자친구가 있었고, 문정 씨는 내년쯤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결혼식에 꼭 가겠다고 했고, 한편으로는 소원해진 내 연애를 생각했다. 부쩍 뜸한 연락이나 밥만 꾸역꾸역 먹고 헤어지는 데이트 같은 것들을 말이다. 가을볕은 맑고 따스한데, 내 마음은 스산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서 문정 씨와 산책하는 그 시간만큼은 자주 웃었다.      


누군가에게 선뜻 알리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무라도 붙잡고 말하지 않으면 참아 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부은 눈으로 출근한 내게 ‘유진 씨, 왜 그래?’라며 메신저로 묻는 문정 씨에게 ‘점심 먹으며 얘기하자’고 답장을 했다. 실연을 하고 난 다음 날도 <로야토야>에 가서 여느 때처럼 매운 카레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문정 씨에게 어제의 일을 요약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러나 그 서사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이 괴로운, 실패한 연애담이었다.      


“그건 아니지, 유진 씨.” 침착하게 듣고 있던 문정 씨의, 전에 없이 단호한 말투였다. 나는 약간 뜨끔했고, 때마침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카레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그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자발없이 굴었을 게 뻔하다. 손 쓸 수 없이 해어지고, 삭은 관계를 막무가내로 기워 보려고 했을 것이다. 늘 다정하고 나긋한 문정 씨가 그토록 딱 잘라 말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건더기가 뭉근해질 정도로 끓인 카레에 시치미(七味) 가루를 쏟아 부었다. 적게 뜬 밥에, 카레를 묻혀 한입 먹었다. 입안 가득 익숙한 점성의 감칠맛이 퍼졌는데, ‘점심 먹지 말까?’라는 오전의 생각이 민망해질 만큼 맛있었다. 음식의 맛 따위를 음미하면 안 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맛있었다. 나도, 문정 씨도 아무 말 없이 먹는 데 집중했다.      

<로야토야>의 매운 카레는 먹다 보면 슬슬 매운맛이 올라온다. 문정 씨의 얼얼한 한 마디는 그날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때처럼 한 그릇을 싹 비우지는 못했지만, 그날도 거의 남김없이 카레를 비웠다.     


이따금 <로야토야>의 매운 카레가 생각난다. 멋모르고 먹다가 시야가 번쩍하는 은근한 매운맛을 느끼고, 뜨뜻하게 데워진 위장을 가지고 식당 문을 나서고 싶을 때가 있다. 조금 지독한 방식으로 내 영혼을 만져주는 카레랄까. 이 카레처럼 그때 문정 씨의 말투가 가끔 떠오르기도 한다.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할 때, 시들한 기분이 들 때 찰싹! 정신의 무딘 부분을 때리는 것이다. 문정 씨는 아마 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시간의 나를 잡아 주었던 기억이다.



2017.11.15.



로야토야                      

02-3144-0911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6길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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