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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07. 2020

일시적인 문제

                 Photo by Paul MARSAN on Unsplash


‘진짜 여기 사람들’이 가는 술집에 가보자는 게 그 밤 우리의 목표였다. 눈은 발등까지 덮일 만큼 쌓여서 걸을 때마다 폭폭 소리가 났다. 눈썹 끝에 눈이 맺혀서 자주 눈을 깜박였다. “여기 사람들은 대체 어디 숨어 술을 먹는 걸까?” 아직 10시도 채 안 된, 새해의 토요일 밤이었다. “우리라면 제일 시끄럽게 2차를 시작할 때 아닌가?” 인가를 찾는 조난자들처럼 밤거리를 헤맸다.


7박 8일의 여행 중 2/3를 보내고, 마지막 행선지는 오타루였다. 돌이킨다면 홋카이도 여행의 중간에 하코다테를 욱여넣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코다테에서 삿포로까지 네 시간, 그리고 다시 삿포로에서 오타루까지 삼십여 분을 기차로 왔다. 이미 지쳤고, 사실 오타루는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여행지였다. ‘스무 살 초반이었다면야 제일 궁금한 곳이었을 텐데.’ 오타루에서 이틀을 묵자는 제이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사실 뾰족한 마음이 들었다. <러브레터>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오타루? 거기 뭐 좀 더 정돈된 삼청동이지.” 언젠가 오타루를 다녀온 지인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오타루역에서 내려 아케이드식 상점가를 지나 작은 가게들을 둘러보면서 그런 생각들은 다 누그러들었다.


여행지에서의 토요일 밤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운하를 구경했고(역시 이건 예상대로 감흥이 없었다), 언제 돌아가도 쾌적한 숙소도 있었다. 다만 그 방에 가기 전에 우리의 기분을 고취시킬 적당한 술집이 필요했다. ‘적당한’이란 말은 애매한 구석이 있다. 분명한 건 ‘한글 메뉴 있어요’라는 입간판을 세운 집, 온갖 음식 사진이 다 붙어 있어 안 파는 음식이 없어 보이는 집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곳에 가기 전, 궁금했던 집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Despera’라는 이름의 엘피 바였다. ‘Otaru LP bar’라고 구글링을 해서 찾은 곳이었다. 육중하고 칠흙같이 어두운 문 앞에 서서 들어갈지 말지 우리는 고민을 했다. 블루스가 짙게 울리고 간헐적으로 사람들이 웃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기는 한데, 공간의 크기며 분위기며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제이는 썩 내키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나는 문을 열어 볼 의향 정도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 밤에 나는 둘 다 만족할 만한 선택을 하고 싶었다.


“저기 어때?” 뒷골목을 헤매다가 제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기 가자!”

하츠하나(はつ花)? 내가 일본식으로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자가 그곳의 이름이었다. 오래된 2층짜리 건물의 1층을 쓰고 있었고 선술집이라면 응당 있어야 하는 낡은 노렌이 걸려 있었다. 높이 단 간판의 불은 간 지가 오래인지 누른빛이었다. 겉보기에 볼품없으니 일단 합격이었다.


드르륵 문을 열었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 내외와 역니은 자 모양의 다찌(이 단어가 잘못 쓰이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만큼 어울리는 다른 단어가 없다) 끝에는 이미 와서 몇 잔을 들이킨 듯한 아저씨 한 명이 있었다. 삿포로든 어디든 ‘스미마셍’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대충 눈짓으로 말이 통하던데, 주인 내외는 일본인 특유의 그 미소는커녕 들어오라는 말도 없어서 몇 초간 문 앞에서 쭈뼛거렸다. 다찌 끝의 단골로 보이는 아저씨만이 어서 들어와 앉으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우리는 현관에 놓인 택배 상자 꼴로 단골손님의 맞은편 다찌 끝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가 우리의 최선일까?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다른 대안도 없었다. 전형적인 일본 드라마의 세트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도 들어서 조금 우스웠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를 떠듬떠듬 읽으며 오뎅과 도꾸리를 주문했다. 마침 오뎅을 건져 먹을 수 있는 커다란 통 안에 제일 좋아하는 치쿠와(竹輪, ちくわ)가 불고 있어서 그걸 가리키며 치쿠와 구다사이했다. 오, 치쿠와? 예의 그 단골손님이 치쿠와라는 걸 아네? 라는 투로 놀라는 척을 했는데, 도대체 얼굴에 표정이 없는 듯한 주인아저씨가 단골손님에게 툭툭 한마디를 더했다. 일본어를 잘 몰라도 몇 자의 단어, 억양, 맥락 따위로 때려 맞추면 ‘말은 못 하는데, 읽기는 하나 보지?’ 라는 것 같았다. 구십 퍼센트의 확률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기다린 오뎅이 나왔지만 애석하게도 맛이 없었다. ‘주인장은 심드렁했지만 그 집의 오뎅을 맛보면 그런 태도는 오뎅에 대한 도도한 자부심이었음 알게 될 맛’이라면 지극히 일본 드라마 같은 전개가 되었겠지. 추가로 더 시킨 명란 주먹밥도 감동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웨어 아 유 후럼? 단골손님이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 코리아, 강코쿠진. 아, 허니문! 명사들로만 이루어진 대답을 했는데, 저쪽에서도 역시 영어 실력을 내세울 만한 처지는 아니었는지 다음부터는 말이 없었다.


천천히 잔을 비우며 낡은 접시와 찬기를 만졌다. 시계추 달린 오래된 나무 시계도 있었다. 벽면에는 신문에서 오린 기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지역신문 같은 곳에 소개된 가게의 기사였다. ‘탐탁해 보이지 않는 표정의 주인아저씨도 웃을 줄 아는군.’ 주인 내외의 모습이 지금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다. 오래된 것들로 이루어진 가게에서 쿰쿰한 냄새도 났다.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었고,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 집에 가면 나던 냄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였다. 할아버지는 작은 판본의 일본책들을 잘 읽었고 달력, 전단지, 포장지로 표지를 싸서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하튼 나는 기억의 징검다리를 겅중거리기도 하고 제이에게 저 시계 좀 보라며 오래된 시계를 가리키기도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시키지 않은 한 도쿠리의 사케를 내왔고, 단골손님을 가리켰다. 아저씨가 우리 쪽을 보며 “호 유, 호 유(For you, for you)” 꼬인 혀로 말했다.


우리는 음식을 거의 다 먹었고 단골손님은 턱을 괸 채 꾸벅거렸다. 위장이 뜨뜻하게 데워졌으니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았다. 새해의 첫 토요일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본어’라고 검색창에 입력했다. 신넨 아케마시테 오메데토 고자이마스, 두어 번을 입말로 따라하고서 제이가 계산을 마칠 때 연습한 인사를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건넸다. 단골손님이 오오! 추임새를 하고(역시 그럴 것 같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문을 열고 나오니 눈이 계속 오고 있었다. 막 발걸음을 떼려는데 다시 가게 문이 열렸다. 주인아저씨가 종종 걸음으로 나와서 내가 알지 못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 본 손님을 배웅하는 것 치곤 꽤 오래도록, 내내 딱딱했던 얼굴이 조금 풀어진 채로. 나와 제이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옆에서 제이가 “아, 지금 저 말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뜻이야”라고 알려줬다. 조금 전, 나와 같이 연신 일본어 새해 인사를 검색하던 그였다. 


관광객의 인사 한마디에 이렇게 풀어질 마음이었다니. 아저씨와 우리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다음엔 손을 흔들어 헤어졌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같은 몸짓으로 배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사케를 마셨고 눈 내리는 여행지의 밤이었다. 숙소로 가는 길,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가자, 각자 딱 두 대씩만 담배를 피우자라고 남편을 꾀어볼까?’ 따위의 생각들을 했다.

여기가 우리의 최선일까? 그곳이 아니었더라도 자문했을 것이다. 물론 어디라든 둘이서라면 그 물음조차 금방 지워지고 말았겠지만, 오타루를 떠올리면 매일 밤 불을 밝히고 있을 조그마한 술집 하나를 그려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정초의 여행지와 제일 잘 어울리는 에피소드가 아닌지.



19. 3. 2. 



*줌파 라히리의 단편 중 <일시적인 문제>를 좋아한다. 쓰고 보니 공교롭게도 그 소설을 닮아 보려고 애를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글의 제목도 아예 '일시적인 문제'로 붙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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