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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l 29. 2019

나의 레드 립스틱

_내가 갖고 있는 몇 가지 레드 립스틱


레드 립스틱 없이 외출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화장대에 두고 온 레드 립스틱 생각이 퍼뜩 들었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 갈 것이다. 집까지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면 하루 종일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하다.

과장을 보태자면, 지갑, 핸드폰, 레드 립스틱만 있다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여유로운 말씨와 너그러운 웃음을 덤처럼 얻고서. 카쉬(Yousuf Karsh)가 찍은 오드리 헵번의 프로필을 떠올리며 가장 우아한 이미지로 기억하는 그 사진을 볼 때의 마음으로 어디로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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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최초의 레드 립스틱은 맥의 <데어 유(Dare you)>였다. 스물일곱 겨울이었다.

그때까지 셔츠와 데님, 반스 어센틱으로 마무리되는 간단한 차림을 줄곧 하고 다녔다. 언제부턴가 한결같은 옷차림에 싫증이 났다. 이전에는 눈에 들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고,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앵클부츠나 진주가 달린 목걸이를. 번지듯 가볍게 발랐던 연한 코랄이나 주황의 립스틱 대신 다른 무엇이 좋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하는 성정이지만, 그때에는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맥 매장의 ‘센 언니’에게 ‘성숙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립스틱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적당히 윤이 나는 흑적색의 립스틱을 보여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나의 요구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선뜻 발라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고, 그날 결국 작고 검은 쇼핑백을 가지고 귀가했다. 적응이 덜 된 높은 굽의 부츠를 신고, 지면을 짓밟는 것 같은 이상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립스틱 밑바닥에서 ‘데어 유’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나는 잠시 감탄했다. 드라마 속 여자들이 독한 마음을 품을 때마다 진한 색의 립스틱을 바르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빨간색 루주를 바르면서, 내가 전과 다르게 꾸미면, 나에게 등 돌린 마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나를 향해서 더 이상 뜨겁지 않게 된 마음을 덥히려는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바람을 맞은 여자애에게 그만큼 적절한 물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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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또 다른 립스틱은 아르마니의 <립 마에스트로 406>이다. 몇 년 전 여름 회사를 그만두던 즈음, 동생에게 받은 선물이다. ‘변화의 시점’이라고 싶을 때마다 새로운 레드 립스틱을 찾았고, 이런 나를 알고 있는 지인들로부터 레드 립스틱을 선물 받았는데, 이 립스틱(엄밀히 말해 틴트에 가까운 제형이다)도 그러하다.

‘406’은 레드보다는 버건디로 구분하는 게 정확하다. 청색의 뉘앙스가 도는 와인빛은, 한 번 가볍게 발라도 제법 강한 인상을 준다.     


퇴사를 마음먹게 된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낱낱이 별것일 수도 별것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들이었다. ‘네 탓’인지 ‘내 탓’인지 가를 수도 없는 이유들. 다만 사무실의 텁텁한 공기에서, ‘오늘도 택시를 타고 귀가해야 하나’하는 걱정에서 ‘왜 이러고 사나’는 푸념에서 비로소 해방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야릇한 방식의 용기를 내고 싶었다. 퇴사일이 정해지고부터 오 일 중 서너 번은 이 립스틱을 바르고 출근했다.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의 치기로 부릴 수 있는 만용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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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바르는 립스틱은 바비 브라운의 <레드카펫>과 로라 메르시에의 <뮤즈>이다. 레드카펫은 다홍색이 도는 레드로, 쨍한 여름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 립스틱을 바르면, 정오를 지난 여름 볕 아래에서라도 생기를 잃을 일은 없다. 쾌청한 날, 해변에 놀러 갈 때 바르고 싶은 립스틱이다. 레드카펫이 발랄하고, 따뜻한 톤의 레드라면, 뮤즈는 서늘한 느낌을 주는 레드이다. 포도 알을 짓찧은 듯한 빛깔이 매력적이다. 모던한 분위기의 옷을 입을 때, 열 번 중 여덟 번쯤 뮤즈를 바르는 편이다. 아직은 무리겠지만, 언젠가 정교하게 입술 선을 살린 후 뮤즈를 두어 번 덧바르는 메이크업을 해 보고 싶다. 그 ‘언젠가’에도 자연스럽게 가닿지 않을까. 나의 시절이 레드 립스틱을 바르기 전과 바르기 시작한 때로 나뉘는 것처럼 또 다른 챕터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것이다.      


레드 립스틱은 내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리는 이정표 같은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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