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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02. 2019

좋아하는 볼펜의 순간

_모나미 153 리미티드 에디션


어디를 갈 때든 수첩과 한 자루의 펜을 가방에 넣어 다닌다. 선호하는 문구 브랜드나 특별히 아끼는 모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특정한 브랜드의 펜이나 노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이들이 멋져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몰취향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들만큼 지나치게 ‘기능주의적'이어서, 나와는 다른 사람들―자신의 취향을 분명히 알고, 그런 확고함을 꾸준히 지켜 나가는 이들―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그저 그때그때 떠오르는 무언가를 적기 위해서 잡히는 대로 펜과 수첩을 들고 다닌다.     


스마트폰의 메모장 기능도 종종 활용한다. 필기를 할 만한 여력이 없을 때 피치 못하고 사용하는 방법이다. 천천히 입력하면 덜 하지만 스마트폰의 터치 자판을 쓸 때면 여전히 오타가 난다. 꼴 보기 싫은 오타를 지우려고 삭제 버튼을 누르는 시간까지 합치면 아무래도 나는 손으로 직접 쓰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차라리 쓰고 만다. 하여간 어디서나 잘 적는다.      


적는 게 버릇으로 굳어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적어온 까닭이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는 퇴근할 때 장을 보아야 할 부식거리를 적는다. 집에서 끼니를 때우는 식품이 달걀, 우유, 새송이버섯 따위로, 이제는 거의 정해져서 외우고 남지만 혹시 더 필요한 게 없을까 하는 마음에, 그리고 뭐 하나 빠뜨리기가 잦은 나를 알기에 일단 적는다.      


자기 직전에 침대 맡에서 적는다. 수첩의 많은 분량이 소모된 장소이기도 하다. 스탠드의 어두운 조도 아래, ‘난롯가’라는 이름이 붙은 향초가 탈 때. 누군가에게 발설하기는 어렵지만 너무도 생생해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어제의 꿈에 대한 묘사를 적는다. 또는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의 구절을 옮겨 적는다. 요즘에는 야마다 에이미의 단편과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를 동시에 읽고 있는 터라 손이 바쁘다. 한 자, 한 자 문장을 새기듯 적을 때도 있고 달음질치듯 휘갈겨 적을 때도 있다. 가장 최근에 적어 둔 것은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참아야 하는 경험을 했다. 우는 것보다도 눈물을 참으려는 노력이 더 사랑에 가까울 것이다’ 같은 문장이다. 어쨌건 언제까지 간직하고 싶고, 탐하고 싶은 글을 베껴 적는다. 많이 읽고, 멋진 문장을 잘 찾는다고 해서 꼭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수첩에 옮겨 쓴 글이 늘어날수록 문장에 대한 욕망도 불어나는 듯하다.      


사랑하는 바 도어스에서도 가끔 적는다. 처음 듣는 노래가 마음에 꽂힐 때, 말수가 적은 사장님께 물어 가수와 곡명을 적기도 하고, 바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공교롭게 음악 취향이 비슷한데 오지랖이 넓은 사람을 만나는 날에는 ‘아무개의 몇 년도 무슨 앨범을 들어보라’는 그의 조언을 수첩에 적어 두기도 한다.      


줄곧 내가 들고 다니는 펜은 모나미 153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첫 직장이던 출판사에서 일할 때 담당 저자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몇 년 전 받은 것인데 아직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쓰고 있다. 어떤 선물이든 귀하지만 당시 모나미 한정판 시리즈가 처음 나왔던 때라서 더욱 인상 깊었던 선물이기도 하다. 그 이전까지 모나미 153 볼펜이란 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필기구 정도로 생각했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다가 없어져도 아깝지 않았고, 어릴 적엔 TV 드라마 어디서 본 기억을 떠올리며 몽당연필을 살린답시고 멀쩡한 볼펜을 망가뜨려 몽당연필에 꽂아버린 적도 있었던.      



모나미 볼펜에 대한 어떤 고정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포장을 뜯고 대면한 이 볼펜이 처음에는 좀 우스웠다. 낯익은 육각주의 몸체에 도금된 니켈과 크롬이 ‘멋지다’는 생각보다는 어색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여전히 곁에 남아서 어디든 묵묵하게 따라와 주는 것은 이 볼펜뿐이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래 만나다 보니 진국인 사람처럼 나에게는 모나미 153 리미티드 에디션이 그렇다.     

슥슥 잘 미끄러지면서도 안정된 필기감하며, 적당히 묵직하게 손안에 감기는 황동의 몸체는 ‘쓰는 맛’을 배가하고, 은연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무광의 외양이 참으로 말쑥하다.      


수첩 위에 마치 문진처럼 놓인 볼펜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볼펜에 대한 애정이 증가할 때는 뒤꽁무니의 조작노크를 딸깍, 눌러볼 때이다. 손끝에 조금 힘을 실어 노크를 누르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노크는 내려가고 볼펜심이 앞으로 튀어나온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게 좋다. 무엇이든 적어 볼 태세가 되었다는 그 준비음은, 내 마음의 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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