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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느라, 그랬다.

by 청유

내가 뭐 얼마나 오래 있다 왔다고 새로운 버튼이 생겨났지. 어젯밤 살짝 스쳤던 찝찝함이 로그인을 하자마자 죄책감이 되었다. 플랫폼이야 내가 잠시 숨어들어가겠다면 알아서 묻혀지는 곳이지만, 다시금 주인의식을 갖추고 찾아오면 그간의 변화에 뜨끔하게 된다.


애정하는 작가님들의 글이 계속해서 스마트폰의 문을 두드렸다. 며칠인지 아니 몇 주일수도 있는 '대단한' 시간동안 잡을 수 없는 물줄기처럼 구독하는 글의 필명과 제목이 나를 슬쩍 적셨다. 충분히 후킹되고도 남는 카피다. 이것만 끝내고 꼭 봐야지, 무책임한 다짐에 하루 수십 번도 속아주며 침착하게 손가락을 단속한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쌓여서 흥건해진 앱알림은 밤잠이 들며 이내 말라버린다.



작년에 입선을 받았던 모 공모전을 올해도 참여했는데, 장려상 수상 소식을 받았다. 직전 다른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기에 간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애초에 팍팍했던 시상내역과 참가인원을 보니 장려상이 감지덕지다. 뭐라도 받았다는 것이 의아한 실력인데 일년 새 두 계단이나 올라 상위권으로 안착했다니. 나님, 정말 잘했다. 성과는 에너지가 되어 공모전 성수기를 이겨낼 동력이 되어줬다. 이로써, 25년도 누가누가상많이받나 가족대회에서 선두로 치고 나가게 되었다. (막내가 유치원에서 이달의 독서왕을 받아오면 승부는 원점이다. 지난달에도 정리상을 받아왔다..) 최근에 마감한, 마감 중인 두 개의 작품들이 좋은 결과를 내줘야 할 것이다. 조금 있으면 이 시기의 막이 내릴테니 더이상 깝죽거릴 기회가 없다.


그러나 내가 개인 활동으로 바쁘든말든 가정의 일상은 유지되어야 한다.

아침 6시 40분, 누군가의 인기척에 잠에서 깬다. 이제부터 약 15분간 얼마나 황홀하게 밍기적거리냐에 따라 수면부족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내 의지로 몸을 일으켰다면 성공이다. 누군가의 부름으로 마지못해 일어났다면 수면부족이 된다. 뭐가 됐든 보통은 7시를 5분가량 남겨놓고 거실로 나간다. 나는 약7시쯤 일어난 것이 아니라 무려 6시대에 일어난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칭찬부터 해준다. 내 자신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이 좋다.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고, 하루 온종일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그래야 산다.


가족들이 나이 순으로 집에서 나간다. 나이와 거리가 비례해서다. 남편의 출근을 시작으로 약간의 텀을 두고 현관이 바쁘다. 고등학생이 학교 가기 싫다며 툴툴거리며 나가고, 중학생이 오늘은 체육이 없다며 구시렁거리며 나가고, 초등학생이 "안녕히 계세요"라고 몇 년째 인사를 못고친 채 나간다. 마지막으로 유치원생이 킥보드를 타네 마네 고민을 하다 내 손을 잡는다.

우리는 눈누난나 풀밭을 헤집으며 굳이 S자 동선을 만들면서 유치원으로 간다. 봄 한참동안 등원길에서 꽃팔찌나 꽃다발을 공수해 담임선생님께 뇌물로 갖다바치고 있다. 아직 키가 1미터도 안되는 막내가 저보다 길쭉한 들풀을 뿌리째 뽑아놓고선 죄지은 얼굴을 한다. 그러려던 건 아닌데.. 막내 눈의 호소에 친절히 대답해준다. 얘네가 있지, 옆에 이 나무들이 마실 물을 다 훔쳐먹고 있었거든. 잘했어!

나는 순간적으로 혼란스럽기도 하다. 모든 생명은 다 가치있다는 것에 반하는 가르침이었을까. 편협한 시각을 주게 하진 않았을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관리자들이 잡초제거를 했고, 내 대답에 정당성을 주었다.


막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면 최대한 빨리 내 시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움직인다. 특히 거실이 너저분하다면 방으로 가는 거리가 꽤 멀어진다.

요즘엔 여름이 왔으니 바싹 긴장할 부분도 생겼다.

빨래.

이것은 내 개인일정까지 간섭할 파워를 가지고 있다.

옷엔 땀이 묻었고, 수건은 두배로 쌓이며, 그걸 감싼 온습도는 일년 중 최고로 비협조적이다. 평소에도 세탁기와 건조기는 하루 두세번씩 돌아갔으므로, 그 이상이 될 여름에도 이들의 로테이션 루틴을 지키려면 틈틈이 세탁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더불어 들통이 등장하는 시즌이다. 세탁일을 주방에서도 참견해야 하는 거사가 되고, 이쯤 되면 이불과 베개 관리는 일 축에도 못낀다. 예전에 누군가와 대가족(?)의 일상에 대해 대화하며, 그 댁은 세탁기를 맨날 돌려야겠어요오오-라고 내게 질문했을 때 얼척없어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저 한 끼 식사의 설거지를 미뤘을 뿐인데, 집에서 잔치했냐고 물어본 손님에게 미안해하던 모습도, 익숙해진 지금의 내 모습도 함께 바라본다. 세월이 언제 어떻게 흘러 이 자리에 있게 된건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뜬구름같은 감정 앞에 놓인다. 앞으로 차차 간소화될 집안일을 마주하면 과연 나는 편할까, 혹시 슬프지는 않을까. 이것이 바로, 할머니들이 가족을 맞이하는 '오면 좋고 가면 더 좋은' 그런 감정일까.


내가 아주 부자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집안일을 해줄 가사도우미를 부를 수도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좋겠다. 욕심에 불과하지만, 가사도우미를 부를 돈이 있으면 고기를 더 사겠어-라고 생각해버린다. 여기서 상상이 끝나면 좋겠는데, 아니 잠깐, 내가 부자면 가사도우미도 부르고 고기도 더 사면 되잖아-까지 진입하게 돼서 문제다. 이때부턴 끄나풀 하나까지도 잡생각이며, 욕심이 아니라 달에 비는 소원이 되어 허무함만 남긴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느샌가 달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나는 참, 바쁘다고 하질 말든가-하며 그냥 웃어넘겨본다.



어제는 둘째딸의 생일이었는데, 케익 대신 연어회를 앞에 두고 생일파티를 하게 됐다. 받고 싶은 선물이 뭐냐는 질문이 아직 물음표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둘째딸이 연어회라고 즉답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무려 1kg의 연어필렛을 선물했고, 정갈하게 썰린 연어회는 어제저녁 생일상부터, 오늘 아침상에도 초밥으로 내어져 임무를 이어가고 있다. 연어에 대한 의무감에 오늘은 다소 억지로 기상하게 됐다. 이럴 때마다 늘 낮잠을 계획한다. 계획대로 된 적은 한번도 없다. 무거운 눈꺼풀보다 더 무거운 건 늘상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오래도록 미뤄온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가벼운데 무거워지고 싶은 것. 더이상 날아가게 둘 수 없어 묶어둬야 할 것들.

모처럼 갖게 된 여유 속에서, 날아다니기보다 땅으로 내려와 걷고 싶었다. 그동안 놓친 작가님들의 글을 오늘 다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아직 열지 않았을 뿐, 분명 보석상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타닥타닥 오랜만에 듣는 키보드 소리가 경쾌하다. 곧 아들이 하교하므로 나도 일어나 셔틀을 시작할 시간이다. 이 시간도, 그 시간도, 나의 시간이다. 안녕, 기록의 시간아. 다음에 다시 올거란 걸 알지만 부디 너무 늦진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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