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다.
나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숨쉬게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 행복은 보통의 행복과 다르다.
건강해서 행복한 것보다
아파도 행복하길,
부자가 돼서 행복한 것보다
가난해도 행복하길,
친구가 많아서 행복한 것보다
혼자여도 행복하길,
일등이어서 행복한 것보다
꼴찌여도 행복하길,
멋져서 행복한 것보다
못나도 행복하길.
나는 내 안의 모든 사랑을 바쳐
그 사람이 위와 같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내가 바칠 따뜻한 사랑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참으로 슬프다.
존중, 배려, 포옹, 위로, 응원, 헌신의
따뜻한 사랑만으로는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다.
거절, 반대, 지적, 냉소, 비판, 부정의
차가운 사랑이 함께 있어야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야
스스로를 지키고 사랑할 수 있는
단단한 소신과 귀한 용기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따뜻한 사랑과 차가운 사랑을
조화롭게 전하는 것이
내가 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 차가운 사랑 때문에
오래도록 가늠하지 못할 것이 있다.
도저히 언어로는 표현이 안되어
보여줄 수조차 없는 사랑이 얼마큼인지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것을,
빙산의 아랫부분 따위는
비교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 사람은 아직 모를 것이다.
45살인 나는 이 세상이
사랑만 있으면 희망에 찰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마법이다.
따라서 나의 절절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그 사람이 희망에 찬 인생을 살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필연적으로 한조각씩
희망이 부수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슬프게 전해온 차가운 사랑이
그 사람의 고난 앞에서 비로소
디딤돌이 되어줄거라 믿는다.
희망이 깨어진 그 자리엔 분명히
단단한 소신과 귀한 용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실의 자리엔 반드시
용기가 되어줄 사랑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갑게 전해졌던 사랑이
사실은 가장 간절했던 사랑이었음을
그 사람, 나의 아이들은
언젠간 깨달을 것이다.
(25년 2월 어느날)
가족 단톡방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토크가 올라온다.
말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매일필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명대사, 명언, 자작글, 책속글귀 등 다양하게 내 마음대로 써서 찍어 올린다. 그럼 그 사진을 필두로 가족들의 인증사진이 부지런한 순서대로 올라온다.
매일필사를 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게 이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생각하는 시간을 갖길 바라는 부분도 꽤 크다. 문해력 보강이나 손글씨 교정, 상식, 자기 확언에 대한 기대는 사실 10%도 안된다.
가끔은 필사 대신 이벤트도 하는데, 저 위에 적은 단상을 지문으로 하여 제목짓기 콘테스트를 열었던 적이 있었다. 대상 상금이 무려 2만원이었던 터라 아주 질좋은 제목들이 모였다. 아이들은, '차가운 사랑 속의 온기', '그저 사랑', '자녀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등을 제목으로 지어 설명과 함께 정성스럽게 공모했다.
이 날, 내가 위 단상을 지문으로 하는 이벤트를 열기로 했던 마음의 계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양육의 경계선이 모호해질 때가 자주 생겼다. 통제 하에 이뤄지던 것들이 하나둘씩 경계선을 침범하고, 자연스럽게 빗장이 열리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성인으로 한발짝 더 다가간 큰딸, 사춘기의 정상에 다다른 둘째딸과 이제막 뒤따라가 진입한 셋째아들.
나이에 따라 커리큘럼을 정해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성장의 속도가 모두 다르며, 몇년 사이에도 시대 자체가 달라진다. 12살일 때 일주일용돈 2천원을 받았던 18살 큰딸이, 이제 12살이 된 동생의 일주일용돈 5천원을 시기하지 않듯. 급변하는 문화환경 속에서 여전히 주춤거리는 나는 이런 입체적인 가정 내 변화를 감지하기가 힘들었다. 잘 모르겠으니 일단은 모조리 수용하는 쪽으로 해야 할까. 하지만 내게도 오랜 세월 축적된 고집이 있으니 쉽지가 않았다. 다행히도 대화의지가 많은 내 성향 덕에 그 간극을 외면하진 않는다.
피치 못하는 충돌이 잦아졌지만 세대 간의 온전한 이해를 바랄 수는 없음을 느낀다. 너는 그렇고 나는 이렇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나마의 이해랄까. 모질게 보이는 서로에게 최소한의 변명이라도 주고받아 신뢰를 유지하고 싶었다.
9시는 오밤중이라는 나와, 9시는 초저녁이라는 딸. 완벽한 동상이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서 그랬어"란 양날의 칼로 지익 선을 긋고자 했다.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 선이다.
아이들은 2만원이 꽂혔다는 토스알림을 기대하며 위의 글을 정독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자신들에게 쓴 편지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공모전의 최종 목표였다.
'<혼내는 엄마의 정당성 호소문>같은 삐뚤어진 제목 금지'라는 조건 때문에, 글이 구차해 보여도 반박하지 못했을 수 있다. (삐뚤어진 제목이 나의 진심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렇게 자위적인 공모전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정작 아이들은 뭘 느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내 마음대로 한시름을 놓았었다.
아이들의 세상이 무게를 더해갈 때, 이 날의 글이 자그마한 의미라도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잊혀진 기억 속에도 무의식은 존재하니, 엄마가 전하고 싶었던 사랑의 깊이를 조금은 이해해주기 바랄 뿐이다.
딸들이 최근 한달 넘게 필사를 안하고 있었는데, 4월1일을 기점으로 아들이 선심을 써 밀린 필사 면죄부를 주게 되었다.(밀린 거 다 해야 오늘 필사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음) 그간의 찝찝함을 털어내고 다시 필사를 시작한 딸들을 보며 문득 지난날이 떠올라 구구절절 적어보았다. 지난날이라고 하기엔 아직도 막막한 시간 속에 있지만, 아이들이 춘추전국시대를 지나간다면 이 혼란의 역사를 전두지휘해야 할 건 부모밖에 없을 것이다. 부디, 나의 사랑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길. 그들의 역사를 바르게 세워주길.. 바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