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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Nov 27. 2024

첫눈처럼 사는 것은

눈이 펄펄 내렸다.

펄펄이라는 단어를 고민하지도 않고 쓸 만큼 많이 내렸고, 금세 수북이 쌓였다.

아직 11월인데, 빨리도 왔다.


날이 추워져 아이들이 좀처럼 이불 밖으로 못나오고 있길래

나는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와아~ 눈이 이렇게까지 펄펄 내려쒀어어~? 와아~ 너무 하얀데에~?"


5,

4,

3,

2,

1.


아이들이 속속 창가로 도착했다.ㅎ 녀석들, 애는 애구나. 아이들의 놀란 눈에는 설렘과 걱정이 각자의 비율대로 섞여있었다.


등굣길이 다소 먼 고등학생 첫째의 눈엔 걱정이 압도적으로 많다. 걱정이라 쓰고 짜증이라 읽어본다. 이래놓고 학교가면 친구들과 조막만한 눈사람 만들어 릴스에 올리겠지.

중학생 둘째의 눈엔 설렘과 불만이 반반이다. 웃으며 궁시렁거린다. 학교 못가겠는데? 아니, 갑자기 이러기? 아니, 오늘 체육 못해? 아니, 너무 심한데? 아니, 아니, 넌 아니밖에 모르냐?

초등학생 셋째의 눈은 신기함과 호기심으로 차있다. 저걸 가지고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눈치다. 장비를 찾아보지만 장갑밖에 없다.

유치원생 넷째는 그냥 무조건 신난다. 거쩡이 머애여-?


나이와 걱정이 비례하는 것은, 이들이 지내온 겨울삶도 녹록지만은 않았다는 것일테다.

나도 눈이 그렇게 좋진 않다.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마지못해 기다려본 적은 있다. 추운 것부터도 싫고, 우산을 쓸지말지 고민하는 것도 싫고, 미끄러운 것도 무섭고 운전도 어렵고 하여튼 그렇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첫눈'은 참 좋다.

첫눈처럼 너에게 간다는 둥,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둥 하는 대중문화의 첫눈 브랜딩(?)이 있어서일까?

손톱 끝에 겨우 매달린 봉숭아물을 드디어 도려낼 수 있어서일까?

애증이 담긴 존재도 너무 오랜만에 보면 반가움이 먼저 드는 이유에서일까?


첫눈이 신나는 5살


패딩을 축축하게 만들고 양말을 젖게 하는 눈이 왜 그 처음만큼은 유달리 좋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이내, 눈은 그냥 자기 하얗자고 주변 어둡게 만드는 차가운 손님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을 나는 <현타>라고 부르기로 했다. 현실의 문제를 동반한다는 걸 첫눈의 경험으로 상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눈은 나에게 책임을 지워준다. 빙판길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할 책임. 세탁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부담, 차를 쓸어야 하는 귀찮음을 줘놓고 얘는 또 사라진다. 며칠씩이나 늘러붙어있을 때에도 그다지 실체있게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주는 숙제가 많다.

그저 감탄으로만 볼 수 있는 첫눈이 그래서 특별한 걸지도 모르겠다. 순수하게 눈 자체로만 대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겐 '첫눈'뿐인 것이다.


오늘은 싫은 눈이 아닌 좋은 첫눈이 왔으니, 잠시 사색을 해본다.

유리창에 닿으면 녹아버리는 모습에서 참으로 덧없는 눈의 인생을 엿봤다. 떨어지는 순간부터 녹을 운명을 지녔지만 한송이 한송이마다 쓸데없이 아름답다. 땅까지 내려오는 동안 고고하게 품위를 유지하다, 도착지에서는 합쳐지거나 소멸된다. 나뭇잎 끝에 떨어진 눈송이는 겨우 몇 초 반짝인다. 그 짧은 순간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우리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끝이 정해진 상황에서도 모양을 유지하며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후회도 없을 것이다.


첫눈처럼 살아가고 싶다. 길게 이어지는 날들 속에서도 반짝이는 순간을 만들어내고 싶다. 아니, 잠깐 머물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반짝이고 싶다. 소리없이 내리지만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다양한 이야기를 남겨내는 오늘의 눈처럼 살고 싶다.



(눈 싫다고 해놓고 눈처럼 살고 싶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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