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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꽃 Jan 27. 2021

아빠와 친해지기로 결심했다

그간 아빠 이야기를 쓰지 못했던 건, 어쩌면 견고한 나의 세계가 흔들렸던 시기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꺼내놓아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내가 좀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뜻한다.




결혼을 하고 나니 세상 모든 딸들이 그러하듯, 친정에 대한 그리움을 전화로 달래는 일이 잦아지게 됐다.

최소 이틀에 한번 꼴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나의 상황, 감정, 일어난 사소한 일들을 시시콜콜 늘어놓으면 나를 잘 아는 아주 오래된 친구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떼는, 아빠는 바깥일, 엄마는 집안일을 하며 육아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우리 엄마는 깐깐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삼남매를 키우셨고, 고생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내겐 항상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었다. 아빠는 작은 사업을 하셨는데, 왠만한 기업의 회장님이 아니고서야 직원보다 더 바쁘고 더 일 많이 하는 소기업의 사장님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우리가 엄마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빠는 늘 바빴다.

아빠는 굉장히 따뜻하고, 분별력도 있고, 매우 허용적인 분이셨지만, 우리와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빠의 마음을 잘 모르고 자랐던 것 같다.


어릴 때는 퇴근해 오는 아빠를 기다리는 게 낙이었고, 어쩌다 주말에 나들이라도 나가게 되면 너무너무 신나서 팔짝팔짝 뛰었던 게 생각난다. 아빠는 텐션이 한껏 올라온 우리들의 고래고래 노랫소리가 귀를 따갑게 해도 그저 '허허허'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셨다.

우리가 점점 자랄수록 아빠의 귀가가 늦어지고, 술냄새를 풍기는 날이 잦아졌다. 아빠가 우리와 놀아주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는데, 그 드문 일마저도 나의 사춘기와 맞물리면서 아예 없어져버렸다. 그래도 어릴 때 아빠를 기다리던 습관이 남아있었는지,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를 확인하고서야 잠이 들 수 있는 사춘기를 보냈다.


쑥쑥 성장하던 아빠의 사업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IMF의 직격탄을 맞았고, 설상가상으로 친한 친구의 사업 실패를 고스란히 떠안으며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우리도 드라마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스토리라인을 따랐다. 작은 집으로 옮겨가느라 할머니는 따로 방을 얻어 나가시게 됐고, 사장님으로 불리던 아빠는 지방에서 아는 사람의 일을 도우며 적은 월급을 부쳐왔다. 엄마는 나와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시기를 버텨냈다.

나는 부유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나니 오히려 아빠의 안위와 가족의 화목이 간절해졌다. 우리 모두 힘든 시기였고, 가족 모두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고, 아빠도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완전체로 합체한 날, 몇 년 간 쉬지 못했던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림이 좀 나아졌다기보다 고유의 기술이 있었던 아빠가 집에서 다닐만한 회사에 직장을 잡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가족이 완전체가 되었다는 하나만으로 마음에 있는 무거운 돌덩이가 고운 모래알이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집에서 출퇴근 할 수 있는 그 회사란 곳은 내가 다니던 학교와 같은 동네였다. 그때가 시간표쯤은 내입맛대로 짤 수 있는 내공이 쌓인 대학교 3,4학년때였다. 아침잠이 많은 올빼미형 인간인지라 1교시 수업을 용케 빼놓았지만, 대중교통을 타고 등교하려면 어차피 꽤 늑장을 부릴 수도 없긴 했다.

어느날 나의 등교와 아빠의 출근 시간이 겹치게 되어 아빠가 학교 앞에 내려다주겠다고 하셨다. 우리 학교는 아빠의 모교이기도 했기에 좋은 핑계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대중교통 대신 편하게 자가용 등교를 할 수 있고, 차비도 굳으니 일석이조였다. 좁은 공간에서 아빠와의 어색한 침묵의 시간만 잘 견딜 수 있다면.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몇 달 간의 시간이 일생에서 아빠와 가장 많이, 가장 다양하고 속깊은 이야기를 나눈 때가 아닐까 싶다.

신이 있다면, '너희 둘이 좀 친해져 보거라' 하고 명령을 내린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아빠와 나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은 빠르게 사라지고 아빠와 나의 목소리가 채워졌다. 진로, 가족, 남자친구 등등 주제도 다양했고, 가끔 엄마에 대한 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엄마와 아빠는 성격이 참 안맞았는데, 엄마와 더 친했던 나는 엄마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아빠와 얘기해보니 내가 아빠와 닮은 점이 훨씬 많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참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이다보니 인생을 먼저 산 선배로서 아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아빠의 진심어린 믿음과 지지가 내 마음에 와닿아 쌓였다.

아빠가 육아에 참여했으면 우리가 조금 다른 유년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생길 정도로 아빠의 마음은 포근하고 듬직했다.


이후 졸업과 취업, 결혼과 육아의 또다른 격동의 10여 년을 보내고 뒤를 돌아보니 그때보다 열 배는 주름지고 나이든 아빠가 보인다. 첫손주를 안고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밝은 웃음을 짓던 아빠. 가족 모두가 아빠가 저렇게 활짝 웃는거 처음 본다고 하자 더 쑥쓰럽게 웃던 아빠.


매정한 딸은 결혼하고나니 엄마를 더 많이 찾았고, 아빠와 다시 소원해졌다. 어쩐지 전화로 단둘이 대화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영상통화 할 때 슬쩍 껴서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아이가 할아버지를 유독 잘 따르는 게 내심 기뻤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못다한 효도를 대신 해주는 것 같아서 아이를 앞에 내세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아빠에게 하루는 전화가 왔다. 평소 용건이 없으면 따로 전화를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때 며칠째 감기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아빠는 평소처럼 몸은 어떤지 뭐좀 잘 챙겨먹고 있는지 물었다. 전화를 하면 늘 묻는 안부였기에 오늘따라 안부 인사가 구체적이고 긴 것 같다 생각하며 용건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빠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아빠, 끊으려고? 뭐 있어서 전화한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냥 했어. 너 아프다길래."

"나 괜찮나 궁금해서 전화한거라고?"

"응."


그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 말을 도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나는 아빠에게 안부 전화를 한 적이 있던가.

어느 날 아빠에게 전화해 "엄마는 뭐하는데 전화 안받아요?" 하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때 이후, 아빠와 다시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는 아빠에게 말 붙이는 것, 아빠의 안부를 묻는 것, 아빠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것, 아빠를 심심하게 두지 않는 것이리라.

마음에 비하면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아빠에게 이유없이 전화해 수다를 떠는 시간을 가진다.

그러다보면 학교에 가는 차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나눈 그때가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본다는 행위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것처럼

마음도 상대의 마음에 가 닿아야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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