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자동으로 학부모가 되었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아이가 그저 학교를 매일 다닐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기본적이고 소박한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유아기 아이의 양육자에서 학부모가 되는 것은 부모가 지나야 할 또다른 종류의 관문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1,2월 등교 준비를 하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던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학교랑 어린이집은 선생님의 말투와 표정도 다르다는데 힘들어하면 어쩌지, 친구는 잘 사귈 수 있을까, 교실에 앉아있는 걸 버텨낼 수 있을까, 선생님 말씀은 집중해서 들을까 하는 보편적이고 어찌보면 당연한 걱정거리에서 시작하여, 이제 공부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영어는 어디를 보내야 하지, 수학도 해야 한다는데, 태권도도 보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책을 좀더 많이 읽힐까... 하는 교육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갔다.
거기에 틈틈이 아이 친구 엄마들의 학원 탐방기와 고급 정보의 공유는 불안을 더욱 증폭시켰으며, 사교육이란걸 전혀 시키지 않고 의지도 없었던 나는 졸지에 아이에게 관심없고 교육에 무지한 초라한 엄마가 되어버렸다.
사교육 시장은 엄마의 불안을 먹고 큰다고 했던가.
방과 후에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할지 스케줄을 짜고 학원을 알아보고 지역의 교육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2월 말이 되자 아이의 일주일 스케줄이 대강 나왔고,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거기까지 해낸 것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만족감도 잠시, 새로운 환경에서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가장 초기의 질문에 대한 대답 치고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저기 놀고 있는, 학교라는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가 충만한 해맑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내가 한 노력이 진짜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최대한 가정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사교육은 아이가 관심을 갖는 것 위주로 해서 천천히 아이 주도적으로 시키자고 했다. 가장 기본은 독서이며, 독서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고 그것을 확장시켜나가면서 필요한 공부를 더 시키기로 얘기했었다. 적어도 초등학교까지는 최대한 경험을 많이 하게 해주고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주도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번민에 빠졌다.
내가 고집하는 그 교육관이라는 것이 꼭 정답일까, 나도 다양한 교육을 많이 받아 덕분에 이만큼 밥 벌어먹고 사는 건 아닐까, 나도 부모에게 많이 받았는데 나는 너무 무심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를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았다.
나는 어린시절,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부모를 거의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는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내 삶의 목표였던 것 같다. 자신의 의지와 주도 없이 끌려가던 학업은 공부가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밑천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게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영어, 수학은 물론이고, 수영, 탁구, 단소, 피아노, 미술, 원어민 영어회화까지 안해본 것이 없었다. 부모님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별로 남는 게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때 배운 것들이 밑천이 되어 다시 공부를 하게 되는 힘이 되었고 내 일을 갖게 되는데 일정 부분 일조했다고는 생각한다. 다만 그 시간을 충분히 내것으로 만들지 못한 점과 그때 느꼈던 이유모를 갑갑함을 생각하면, 큰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내 아이에게 내가 느꼈던 그 답답함과 무기력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결핍과 경험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내 교육관은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근 세 달 동안 실컷 휘둘리고 나서야 내가 진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지 제대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입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보통 좋은 대학에 보내는 일을 1차적인 목표로 삼지만 장거리레이스에서 마지막 스퍼트에 집중할 에너지를 남겨놓기 위해서는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그런데 꼭 우리나라 대학을 가야할까? 세상은 넓고 갈곳은 많은걸.
아이가 알아간다는 것은 힘들지만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좋은 관계로 지속되기를 바란다. 엄마표가 가능한 부분에서는 놀이처럼 하되, 부담이 되면 즉시 그만둔다. 필요시 최소한의 사교육의 도움을 받으며, 보조적인 역할만 엄마가 한다.
아이에게 주도권을 주지 않고 자기주도적인 공부를 해내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독서는 지속적으로 가족이 함께 해나간다. 이때 제대로 된 독서를 해야하는데, 책을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관련 분야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고 다른 영역과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돕는다.
아이의 속도에 맞춘다. 우리 아이는 수학에 흥미가 있어 금방 습득하지만, 영어는 아직 흥미가 없다. 동학년의 수준이 아니라 아이의 수준에 맞춰주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아이를 잘 관찰한다. 아이의 특성을 파악하여 맞춤 교육을 한다. 우리 아이는 완벽주의적인 기질이 있다. 아이의 기질을 고려하고 거기에 맞는 필요한 것을 지원해준다.
바르고 인간적인 아이로 키운다. 아무리 잘나도 인간답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금물. 첫째가 인성, 둘째는 자존감, 셋재가 비로소 능력!
사실 지난 세 달 동안 생각을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이제야 비로소 내 생각을 조금은 정리할 만큼이 되어 이 글을 쓴다.
아이와 나는 함께 출발점에 서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울퉁불퉁한 길도 있고, 전혀 새로운 길이 나오기도 한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저 들여다보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대화하고 생각하고 정리를 허며 길을 찾아나가는 것일 뿐.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서는 입 가진 사람이면 다 한 마디씩 한다는 말이 있다. 수시로 바뀌는 정책과 성과주의에 따른 입시제도는 차치하고서라도, 각자의 가치관과 교육관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며, 교육에 대해 그만큼 관심이 있고 비판적이고 다양한 생각을 나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주관을 가지고 아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므로 나와 생각이 다른 부모를 비판할 마음은 전혀 없다.
예전에는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다. 이번 번민의 시간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고집스럽고 자기 세계에 갇힌 사람으로 멈춰있었을 것이다.
내 기준과 주관을 가지되, 타인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며 내가 가진 가치관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수정, 보완하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엄마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