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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꽃 May 17. 2022

엄마는 비정했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돌봄은 일방적이지 않다. 





뭔가 이상했다. 몇 일째 같은 의심이 들었지만 의심하는 나를 자책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설마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는 매일 수학 문제집 4쪽을 푼다. 

“핀란드 수학”

아이의 유치원 친구 엄마의 추천이었다.


그녀는 화장기 없지만 맑은 얼굴에 군데군데 긴 흰머리가 있는 까만 긴 생머리를 고수했다. 젊은 날의 추억까지 켜켜이 쌓여 보이는 옷을 단정하게 입고 금장 장식이 달린 까만 작은 백팩을 항상 매고 다녔다. 

그녀는 집에서 다소 먼 유치원을 매일 아이와 함께 버스로 통학하면서도 아이를 가장 먼저 등원시켰다. 아토피가 있었던 아이의 간식은 늘 손수 만들었다. 가장 큰 사이즈의 지퍼락 봉지에 말린 사과며 배, 고구마를 가득 담아 친구들 간식까지도 넉넉히 챙겼다. 참여율이 저조했던 유치원 부모 모임에도 그녀는 항상 자리를 지켰다. 유치원 행사가 있었던 저녁 날, 그녀의 남편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그녀가 더 멋져 보였다. 장애를 가진 남자를 선택한 모습에 당당함 너머 경이감까지 느껴졌다.


일면식도 없는 이순재의 말도 아니고, 그런 그녀의 추천이라면 정말 묻고 따질 것이 없었다. 이름마저도 호감이 갔다. 행복지수 1위 국가인 핀란드의 수학 교과서 번역서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핀란드 수학”문제집을 풀게 한 것이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고, 초등 2학년 봄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 사달이 났다.


의심을 들었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심을 하는 나 자신이 더 부끄러웠다. 아이가 답지를 베꼈을 것이라는 내 의심이 아이의 순수함을, 아니 내 아이를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눈 같이 하얀 아이에게 답지를 보고 베꼈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에 답지를 본 것이 아니라면 나는 아이를 믿지 못한 엄마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의도치 않게 범죄의 수법(?)을 엄마인 내가 알려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판단 아래 섣불리 아이를 추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인내심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상함이 감지되기가 4일이 넘어갔을 때, 문제집을 채점하던 중에 아이를 불렀다. 그리고 한 문제를 가리키며 풀이 방법을 물었다. 아이는 문제를 빤히 쳐다보며 자신이 문제를 풀었던 상황을 복기하듯 입을 지긋이 다물고 힘주어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의심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최대한 의도를 감추며 입을 뗐다.


“엄마도 이 문제는 쉬워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푼 거야? 천천히 설명해 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바로 생각이 안 나는 걸 거야, 아니면, 생각을 정리하려는 거겠지.’

아이와 함께 일그러지는 내 마음을 펴보려 머릿속에 수만 가지 긍정 회로를 돌렸다. 그러나 역시 나는 그다지 참을성이 강하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원아, 솔직히 이야기해. 너 답지 봤어?”

“......”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는 순간에도, 그저 재밌는 해프닝이 되길 바라며, ‘아이가 답지라는 말을 알까?  답지라는 말을 몰라서 아무 말이 없는 걸 거야.’ 하며 아주 적은 가능성마저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아이는 내 기대를 꺾고 자백을 했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답지를 베낀다는 생각을 해낸 것과 답지를 베껴 낸 문제집을 들고 내게 다 풀었다고 말한 것과 엄청 빨리 풀었다는 내 칭찬을 태연히 들었던 것까지 생각하니 괘씸하고 혼란스러웠다. 그순간 나는 하나의 감정이 되어 아이 앞에 서 있었다. 휘몰아치는 내 감정만 바라보느라 바쁜 엄마는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는 보지 못했다.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과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그저 삼켜내며 눈물만 쏟을 뿐이었다.


아이에게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하고 나도 안방으로 들어가 숨을 골랐다. 거실에 던져버렸던 문제집을 주어들고 아이 방으로 갔다. 침대에 웅크려 울고 있던 아이는 나를 보고 긴장한 듯했다. 사건은 당분간 수학 문제집을 풀지 않는 것으로 적당히 마무리됐다. 덧붙여 아이에게 어려우면 답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엄마도 답지를 따로 빼두지 않았고, 네가 힘든 걸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저녁,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린이날 선물로 받은 레고를 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아이가 너무나 풀기 싫은 문제집을 앞에 두고 어떤 감정을 겪었는지 떠올리게 됐다. 아이는 어떤 마음에서 답지를 보게 된 것일까. 얼마나 오랜 시간 이런 감정을 겪은 것일까. 아이는 문제가 어렵고 힘들었을 때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아마도, 분명히, 물었을 것이다. 그것도 수차례. 아마도 내 반응이 아이에게 묻기보다 답지를 보라고 말했던 것이겠지. 

답지를 베끼라고 한 것은 엄마인 나였다. 


“거짓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 엄마 미안해.”


아이가 흐느끼며 겨우 소리를 내어 말했을 때, 나는 너를 믿지 못하게 돼버렸다고 답했다. 어떻게 네가 풀지도 않은 문제집을 엄마에게 내밀며 다 풀었다고 말할 수 있냐며 아이의 비양심을 질책했다. ‘네가 나빴다고. 나쁜 아이라고.’ 소리치는 엄마의 마음을 아이가 들었을까?  괴로운 선택을 하게 만들고 그 행동을 비난당한 아이의 심정을 떠올리니 한없이 미안했다. 엄마는 비정했다.


아이를 꼭 껴안으며 거짓말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이는 괜찮다며 사랑한다고 다시 나를 꼭 안아준다. 누가 엄마인지 모르겠다. 누가 위로를 받고 누가 누구를 돌보는지도. 아이는 나보다 마음이 더 넓다. 그리고 아이는 내 곁에서 여전히 하얗고 맑고 더없이 투명하다. 나조차 투명하게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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