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비꽃 May 18. 2022

그 배려 너나 하세요!






"11월 11일은 7세 형님들이 졸업여행을 가는 날입니다. 이에 김 모 교사와 이 모 교사가 자리를 비울 예정입니다. 가정보육이 가능하신 부모님께서는 가정보육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밴드에 새 글이 올라왔다. 유치원의 연례행사로 매년 11월이면 7살 졸업반 아이들은 1박 2일로 졸업여행을 떠난다. 올해의 졸업 여행 일정이 확정되었고 5, 6세 아이들 부모에게 가정보육을 권유하는 공지 글이 올라온 것이다.


아이들 하원 후 놀이터에 삼삼오오 엄마들이 모였다. 그중 한 명이 밴드 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11일에 아이 등원시킬 거예요?"

둘째를 임신해서 배가 불룩 나온 엄마가 배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난 아무래도 우리 둘찌 때문에 힘이 들어서..... 등원시켜야 될 것 같아요."

옆에 있던 아이가 둘인 엄마가 말했다.

"준우 네도 애가 셋이니 안 보내긴 힘들 것 같고, 연우 네는 일을 하니 어렵겠고..."

노골적으로 아이가 혼자인 사람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하나인, 전업주부인 엄마가 가정 보육을 하는 것이 맞다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가 혼자였던 나는 울컥 화가 났다.

나도 똑같이 1인 비용의 원비를 내고 유치원에 보내는데 왜?

아이를 하나 낳고 둘 낳고 셋 낳고는 본인들의 선택이 아니었던가요?

아이를 하나 낳은 부모에게 무슨 권리인 양 배려를 요구하는 거지요? 따져 묻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대책 마련 없이 부모의 배려에만 기대어 일을 추진하는 유치원의 ‘배려 없음’에 화가 났다. 또 개인의 사정이 가정보육 여부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녀의 수가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또 그것이 상식인양 받아들이는 그들의 사고가, 당황스러웠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개인의 선택으로 남겨두어야 할 부분에 배려라는 옷을 덧입혀 부모들 사이의 불편한 감정을 겪게 하고, 또 그들이 나서서 서로에게 불편한 선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방관한 기관의 태도였다. 나는 이기적인 것일까? 배려심이 부족한 것일까?

당시 나는 개인적인 일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고, 아이를 등원시켰다.


어느 날 외동아이를 두었던 지인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운영위원회에 참가해 달라는 공지를 받았다. 그녀는 별다른 회신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들과의 이야기 도중, 운영회 이야기가 언급됐다. 워킹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전업맘이 으레 운영회를 맡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불편함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꼈다. 다음 날 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원장은 그녀가 아이가 하나이고 지금 일을 쉬고 있다는 사정을 에둘러 언급하며 강요 아닌 강요로 운영위원회를 맡아 줄 것을 권유했다. 그녀는 원장의 당당한 권유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어 원장은 운영위원은 아주 가끔 유치원 외부 행사에 참여하며, 아이가 지내는 모습을 직접 관찰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그녀를 설득했고, 그녀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리고 며칠 뒤 원장의 두 번째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 피자 만들기 외부 행사 일정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월요일 10시까지 피자헛 모 지점으로 와서 아이가 피자 만드는 것도 보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 지도 볼 겸 좋은 마음으로 원장의 제안을 수락했다.


"아이 잘 봤어? 어땠어?"라는 내 물음에 그녀는 다른 아이들 챙기느라 본인 아이는 보지도 못했고, 갔다 와서 드는 생각은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라는 자괴감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운영 위원회는 사실상 무보수 노동 착취의 대상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이를 가진 엄마에게 당연히 도출될 것으로 여겨지는 모성애에 기대어 원장은 당당하게 그녀를 보조 선생님 부리듯 뒤치다꺼리를 시켰고, 그녀는 원장이 말한 그 특혜(?)를 톡톡히 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이가 하나이고, 지금 일을 하지 않는 본인이 그렇지 않은 다른 엄마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당연한 것인가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원장이 자기를 그 대상으로 삼음에 당당한 것도, 자신이 원장의 제안에 의무감을 느끼며 수락한 것도 부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일정 시간 아이들을 보육할 의무가 있다. 반대로 어떤 부모든 그 시간에 대한 명백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유치원과 원장 모두 그들의 의무를 부모에게 전가함에 서슴없었다. 그들은 권유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배려를 요구했고, 부모들 사이에서 일어날 불편한 감정과 상황에 대해 방관했다. 그 불편함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로를 겨냥했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상대방의 배려에 권리를 가진 자가 누구인가.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기 위해 급조된 근거들.  같은 여성으로서, 부모이니까, 젊은 사람이, 며느리는, 맏이라면 이라는 모호한 말에 기대어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맡겨놓은 배려인 양 배려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하고 싶다.



그 배려 너나 하세요!


작가의 이전글 엄마는 비정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