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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꽃 Jul 14. 2022

우리는 만나야 한다

낯선 세계가 나에게 다가왔다.




우두둑 소리가 집안까지 들린다. 빗줄기가 어찌나 굵은 지 창밖이 뿌옇다 못해 시커멓다. 장마라지만 이쯤 하면 너무하다. 베란다 창을 열어 얼마나 억센 놈인가 한참을 봤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곧 하원할 시간인데. 이 빗속을 뚫고 걸어오면 온몸이 쫄딱 젖을 텐데. 애는 좋다고 날 뛰겠지. 옷이 엉망이 되는 건 둘째치고 애가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걱정됐다. 알아도 그치기가 힘든 이 쓸데없는 걱정.

막 아이를 데리러 나갈 채비를 하려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녀였다.


“아직 하원 안 시키셨죠? 저 10분 뒤에 유치원에 도착할 것 같은데, 제가 원이 하원 시켜서 주차장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처음, 그녀의 호의를 받고 고마웠지만 불편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굳이 우리 집을 빙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미안해 집에 있는 과일을 주섬주섬 챙겨서 주차장으로 갔다.


그녀는 늘 ‘솔’ 톤을 유지한다. 유치원 선생님인 직업의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내 기준에 과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말투는 나를 긴장시킨다.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묘한 경계심. 친절하다 못해 그 의도가 궁금해지는 과한 배려를 하는 그녀가 신기했다. 마치 친절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체화한듯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녀도 어딘가에서 가면 없는 맨얼굴이 되겠지. 아휴 딱하다.’

나는 참 나답게 생각했다.   





장마는 한 달을 꼼꼼하고도 촘촘하게 채웠다. 비와 함께 그녀의 전화도 나의 일상이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자연스레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고 전화가 늦어지면 무슨 일인가 싶어 내가 먼저 전화를 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완벽하게 길들였다.


 혼란스러웠다. 이런 배려가 가능하다는 것도.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배려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이 놀라웠다. 단순히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을 돕고 싶어요.” 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행동들이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완전히 가까워진 사이가 아니라면(그런 사이라 해도) ‘테이크(take)’가 없이 완전한 ‘기브(give)’만이 존재하는 행위는 겪어본 적도 행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나를 벗어날 수 없기에 그녀의 의도 없는 행동에서 자꾸만 의도를 찾으려고 했다. 나는 그저 나라서, 나 이상의 사람과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나 이상의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주었고, 만나게 했다. 의도 없는 배려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게 나를 감응시켰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 저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자신 이상을 경험시켜 주고 싶다. 나도 나를 넘어선 세상에 들어가고 싶다. 어쩌면 나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도 아닌 ‘나’를 벗어나는 일이 단번에 되겠나. 나는 또다시 나의 작은 성취를 축하해주는 한 사람의 마음을 의심했다. 진심을 진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선의를 깎아내리는 내 불행한 모습. 또다시 보았다. 여전히 그곳에 질기도록 붙어있는 ‘나’라는 존재. 벗어나기 힘든 나라는 세상.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나 이상의 곳.


나는 왜 순수한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순수한 마음의 존재를 부정하고 거기에 불순한 의도를 입혀 나만큼이나 시커멓게 만들어 버리려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세상에 특별하게 좋은 인간은 없다고 세상 사람 다 거기서 거기라고 믿고 싶었던 걸까. 내가 참 별로라서 다들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마음이 편했나. 나도 구리지만 남들만큼만 구리다고, 남들보다 ‘더’ 구리진 않다고 나를 위안하고 싶어서?





낯선 세상은 내게 말을 건다. 의심하지 않아도 돼. 긴장하지 말고 이 온기를 그대로 느껴봐. 누군가의 진심을 그 마음 그대로 받아들여도 위험하지 않아.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내 세계의 울타리를 열고 상대의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나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으며, 내가 분리해 놓았던 선과 악을 뒤죽박죽 섞어 버리며,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너를 만나며 이해의 폭을 넓혀나간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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