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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꽃 Feb 28. 2023

흰머리

늙음의 흰 파도가 나를 덮칠 때





늙음을 속절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흰머리의 확산속도에 전의를 잃었다. 아니 처절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흰머리는 뛰어난 전술가였다. 넓은 범위에 하나 둘 병사를 심어 놓았다면 나는 이내 뿌리를 뽑아 한동안 전장에 얼씬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흰머리는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병사를 배치했고 끊임없이 인력을 추가 했다.


더욱이 전의를 상실하게 한 것은 그것이 내가 늘 타던 가르마와 노출도가 높은 이마 라인에 집중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르마를 따라 적군이 하나 둘 사살되자 가르마의 흰 라인은 더욱 도드라졌고 탈모의 공포가 밀려왔다. 가르마를 바꾸자니 그 어색함이 또 나를 괴롭혔다.


결국 무기를 도입했다. 쪽가위로 흰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타협을 했지만 흰머리를 자를 때마다 무고한 희생을 치르는 검은 머리들로 흰머리 집중 구역은 흡사 원형탈모를 연상케 했다.




흰머리 몇 가닥을 숨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기에 나는 그리도 많은 검은 머리의 희생에 눈감았을까? 늙음은 젊음과는 다르게 왜 이렇게 어색하고 낯설고 부담스럽고 불편할까?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낀다는데, 내가 예상한 것보다 늙음이 빠른 속도로 왔다는 억울함이 불편할 수 있겠다. 또 내가 강렬하게 기억하는 것들 속에서 나는 아직도 젊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데 내 몸은 늙어가고 있는 이 부조화가 낯섦의 이유다. 또 아직 나는 이룬 것이 없는데 이미 늙어버린 내 몸 앞에서 느껴지는 부담과 초라함 또한 그 불편함의 이유일 수도 있겠다.


오늘도 늙음과 분투하는 내게 아이는 늙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 10년 뒤 100년 뒤를 말한다. “내가 100살 되면 엄마는 할머니야?”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을 밝히며 자신에게 올 젊음을 기다린다.

“네가 100살이면 엄마는 더 이상 여기 존재하지 않지.” 라는 대답에도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각이 없는 너는 먹던 밥을 그냥 먹을 뿐이다. 그런 너를 보며 너는 지금을 네 시간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나는 매일 고민을 한다. 나는 내 정신의 나이로 살아 야하나 내 몸뚱이의 나이로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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