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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의 깃발을 들다

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3.

by 한상언

유학생들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풍회 등 사상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특히 관동대지진으로 발이 묶인 유학생들은 더욱 활발하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윤기정이 야구를 통해 관여했던 (스포츠) 운동 단체는 이제 또 다른 의미의 (사회주의) 운동 단체로 대체되었다.


도쿄에서 유리공장 노동자 생활을 그만두고 돌아온 송영을 중심으로 이적효, 이호, 박세영 등이 무산계급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한 염군사라는 문예 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최초의 사회주의 계통의 문예 단체였다. 임시 사무소를 청운동 79번지에 두었던 염군사에서는 1923년 10월에 잡지 『염군』을 발행하기 위해 원고 검열을 맡게 된다. 이 잡지는 4 ×6 배판 32페이지로 총 2천 부를 발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총독부에서는 문예잡지라기보다는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정치 슬로건이 강조된 계몽잡지의 성격이 도드라진 『염군』의 출판을 불허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결국 총독부에 납본만 하면 되는,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명의로 잡지를 내기로 하고 1924년 2월과 3월에 잡지 발간을 추진했지만 발행 즉시 모든 부수를 압수당하는 것은 물론 회원 모두가 경무국에 체포되어 따귀를 실컷 맞고 풀려나게 된다.


무산계급의 문예잡지 발간에 어려움이 크다는 점을 절감한 염군사에서는 문학 이외에 연극부와 음악부를 두어 이들을 근로 대중 단체의 회합과 동맹파업의 현장에 파견하여 선동 활동에 이용할 계획을 세운다. 그때 이들이 주목한 단체가 토월회와 극예술협회였다. 이 두 단체 역시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도쿄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중 토월회는 예술지상주의적이었으며 극예술협회는 보다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우선 송영은 자신이 나온 배재학교 동기인 극예술협회의 최승일을 만나 염군사에 들어와 함께 활동하자며 권유했다. 그러면서 극단 창립도 도와달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배재학교를 나온 염군사의 이적효는 인쇄소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극예술협회의 김영팔에게 염군사 동인으로 동참해 줄 것을 청했다. 그후 염군사에 합류한 최승일은 지인 심훈을, 김영팔은 지인 윤기정을 동참시켰다. 이렇게 하여『신문예』 동인 윤기정은 염군사의 회원이 되어 본격적인 무산계급 문예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윤기정, 김영팔, 최승일, 심훈 등 극예술협회와 『신문예』 동인을 끌어들인 염군사는 회원이 크게 늘었다. 연극부만 해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이 중에는 여성회원으로 이혜숙 형제와 30대 미혼 여성인 박충원도 있었으며 음악부에 지정신, 최성삼 등 사회주의 계통의 여성들도 있어서 극예술협회에서처럼 여역을 남자들이 맡아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학습을 통해 무산계급 문제에 대해 이해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한 윤기정은 기독교에 바탕한 민족주의자에서 무산계급의 문제에 천착하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문학관과 세계관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때 염군사 문학부의 성원들은 '曉'를 써서 아호를 만들었다. 마치 형제처럼 윤기정은 효봉, 이호는 효부, 이응종은 적효, 지정신은 효천, 홍순준은 효민이였다.


염군사 연극반에서는 공연을 위해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송영은 <모기가 없어지는 까닭>을, 심훈은 『신문예』에 실었던 <먼 동이 틀 때>를 제공했다. 김영팔은 형평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백정 계급의 해방을 다룬 <곱창칼>을 썼다. 송영은 대성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을 다룬 장막물을 준비했다. 레퍼토리를 준비하면서 단원들의 연습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공연 비용이 턱없이 부족했다. 할 수 없이 염군사에서는 연극 공연을 미루고 대신 파업 현장에 벽소설을 게시하고 이동합창대를 보내거나 간단한 촌극을 공연하는 식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에 일제 경찰은 단원들을 붙잡아 조사하였다.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나온 회원들이 하나, 둘 대열에서 이탈했다. 경찰의 심한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조직을 개편하여 새롭게 출발할 필요가 있었다.


1925년 봄, 송영과 최승일은 개벽사 학예부장으로 있는 박영희를 찾았다. 박영희 역시 이들과 배재학교의 동기로 이 무렵 백조의 잔당이라 할 수 있는 김기진 등과 파스큘라라는 단체를 조직해 있던 상황이었다. 파스큘라는 김형원이 조직한 생장사와 박영희의 개벽사가 주최한 문예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생장사 혹은 개벽사의 이름을 붙이기 애매하여 이를 주도한 인원들 각각의 이름, 영문 이니셜을 따서 임의로 만든 단체였다. 파스큘라의 회원들은 염군사 회원들보다 이름이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특별한 활동이 있지는 않았다.


이 단체를 이끌던 인물은 팔봉 김기진과 회월 박영희였다. 이중 김기진은 토월회 멤버로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씨를 뿌리기 위해 박영희를 비롯해 파스큘라의 멤버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열심히 전파했다.


1925년 2월에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파스큘라의 문예강연회를 접한 염군사의 멤버들은 파스큘라를 무산계급의 문예운동과 같은 공동의 관심을 공유하는 단체로 파악하고 합류의 대상으로 삼기로 한다. 우선 송영과 최승일이 박영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박영희는 최승일을 김기진에 소개했다. 최승일과 김기진 모두 배재학교 동기였지만 별다른 교류가 없던 상황이었다. 최승일은 김기진에게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서로 접점이 많기에, 작품 창작 외에 여러 가지 수단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선전 활동에 나설 공통의 조직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다.


김기진이나 박영희 모두 염군사의 정치 지향적 활동에 통합을 망설였다. 염군사에서는 송영과 최승일, 윤기정이 나서서 파스큘라의 박영희와 만나 통합을 논의했다. 이들 염군사 회원들은 박영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김기진은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이제 윤기정과 송영, 박영희가 함께 김기진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 이날의 불편한 기억을 김기진은 “송, 윤 두 사람이 하나는 깐족깐족한 편이고, 하나는 웅얼웅얼하는 선명치 못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김기진을 설득하는 데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계속된 설득으로 김기진까지 합동에 찬성하게 되면서 두 단체의 통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통합을 결정한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회원들은 변호사 이인의 집에 모여 세부적인 논의를 계속했다. 이인은 염군사 동인인 이호의 가형이자 변호사였기에 경찰이 함부로 할 수 없었다. 2-3 차례의 회합을 갖은 후 1925년 8월 22일 관수동 160번지 이인의 집에서 박영희(朴英熙), 이호(李浩), 이성해(李星海), 심대섭(沈大燮), 송영(宋影), 최승일(崔承一), 김온(金馧), 이적효(李赤曉), 김영팔(金永八), 박용대(朴容大), 안석주(安碩柱), 김기진(金基鎭)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윤기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하 카프)의 창립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통합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카프의 창설 멤버로 서기장 직을 맡아 카프의 활동을 이끌게 된다. 윤기정이 서기장 직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박영희의 지원 때문이었다. 애초 접점이 크게 없었던 둘은 통합을 논의하는 가운데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김기진은 훗날 카프 시절을 회고하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조직된 후 오랫동안 서기국을 맡아온 사람이 윤기정이었고, 윤은 박영희를 업고, 또 임화의 조종을 받으면서 카프의 헤게모니를 쥐고 지낸”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김기진의 삐딱한 시선을 조금 순화하여 이야기하면 윤기정은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이질적인 문화에도 불구하고 두 단체가 통합한 카프의 살림을 맡아할 정도의 통솔력을 갖추고 맹원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으며 재능은 뛰어나지만 행동이 방정치 못한 임화를 품어 안을 정도의 아량도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윤기정의 큰 형 같은 자세는 그가 창작보다는 조직 활동에 주력하게 되는 주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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