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5.
윤기정이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연구생들을 대거 카프로 끌어들인 것은 카프 1차 방향 전환의 강령을 실천한 것이었다.
6.10 만세운동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1926년 11월 15일, 사회주의 운동 단체인 정우회에서 새로운 운동 방향을 제시한 “정우회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을 통해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좌파 진영은 협동 전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결국 민족유일당으로 신간회가 설립되는 등 독립운동에 있어 큰 변화가 만들어진다.
“정우회 선언”이 『조선일보』 지면에 보도된 후 조선의 사회 운동 단체들은 공동전선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카프도 마찬가지였다. 1926년 12월에 열린 카프 임시 총회에서는 “단결로서 여명기에 있는 무산계급 문화의 수립을 기하겠다”라는 강령을 발표하고 김복진, 김기진, 이양, 박영희, 김경태, 최승일, 안석주 등 7인을 위원으로 선출했다.
1927년 1월 들어 신간회의 창립 준비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고, 1월 19일 ‘1. 정치적 경제적 강성을 촉진하고 2. 단결을 공고히 하고, 3.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3개 항의 신간회 강령과 발기인 씨 명이 발표되었다. 그 후 한 달이 채 안 된 2월 15일 창립총회가 열렸다. 신간회 창립에 맞춰 카프에서는 14일 밤 위원회를 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보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은 신간회의 창립을 축하함.
우리는 인류가 최초로 가지는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전진한다. 전진에는 전진하는 전 대중의 조직이며 또 그들의 지도자인 전위가 필요하다. 그런데 복잡 기구(崎嶇)한 당면임무를 가진 조선 민중에 있어서는 그 당면임무에 대하여 한 가지로 용감한 전 민족의 협동적 전위를 가지지 아니할 수 없으니, 신간회는 정(正) 히 그것이며 또 그것일 것을 우리는 믿고 또 바란다.
조선 민중의 불평과 정열과 힘을 조직하라.
조선 민중의 역사적 전진을 지도하라.
신간회의 기치로 하여금 조선 민중의 위에서 광휘 있게 하라.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설립으로 새로운 예술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구체적 실천을 추진하기 위해 카프에서는 1927년 4월 5일 임시총회를 연다. 이날 총회에서 좌우합작 운동을 카프 내에도 받아들이기 위해 1. 신인의 유도, 2. 노동조합과 무산자 단체에 대한 문화 방면의 원조, 3. 문화 분야에 있는 국제 공동행동, 4. 공동 발표 기관을 설치, 5. 기관지 발행 등을 강령에 넣었다.
신간회 발족과 더불어 무산계급의 문예 운동 단체인 카프가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에는 조각가이자 공산주의 운동가인 김복진이 그 배후에 있었다. 1926년 12월 『조선지광』의 「문예월평」에서 김기진이 작품을 평하며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인데 기둥도,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얹어놓으면 건물이 되겠는가.’라며 비판하자 박영희는 김기진의 주장이 예술지상주의적이라며 ‘문학은 노동계급의 전위로 하여 발동할 기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카프 내의 논쟁에 대해 김복진은 동생 김기진에게 “이번 논쟁에서 너의 주장은 전체 무산 계급 전선에 해가 된다.”면서 박영희의 손을 들어줄 것을 명령하였다. 결국 김기진은 “만일 나의 주장이 우리들 전체의 운동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나는 잘못했다”라면서 박영희에 사과하며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이는 공산청년동맹의 간부이며 공산당의 경기도 조직 간부로 있었던 김복진이 신간회 창립에 방해가 될 것 같은 논란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개입이었다. 이는 김화산의 글에 대한 윤기정, 조중곤, 한설야의 반박도 어쩌면 김복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간회 발족 이후 교토에 있던 윤기정이 서울로 돌아왔다. 여름 방학을 맞아서는 도쿄의 카프 소속 조선인 청년들이 주축이 된 제삼전선사의 일행이 조선 전역을 돌며 문예강연을 열기로 한다. 문예강연의 연사들은 조중곤, 한식, 김두용, 홍효민 등이었다. 이중 홍효민은 염군사의 ‘효민’이었으며, 조중곤은 카프 창설 직전 윤기정이 그의 현상공모 입상작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였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몇 년이 지나 철저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서울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도쿄를 떠나며 『제삼전선』을 짐짝에 넣어 철도 수하물로 서울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잡지는 수하물 채로 종로경찰서에 압수당하였다. 다행히 도쿄에서 별 탈 없이 발행된 잡지인지라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강연을 이어갔다. 종로 YMCA에서 열린 문예강연회는 큰 성황이었는데, 강연 중 장내에서 『제삼전선』을 팔다가 임석 경관에게 판매 중지를 당하기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열빈루에서 카프 회원 20여 명이 밤참을 먹으며 향후 예술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있었다.
이 당시 카프의 사무실은 견지동 85-3번지 목조 건물 2층에 있었다. 여러 사회단체들이 모여 있던 이곳 사무실은 주로 윤기정이 지키고 있었다. 얼마 후 제삼전선사를 이끌던 이북만이 도쿄에서 건너와 제삼전선사의 주요 멤버들이 서울에 다 모이게 된다. 이를 계기로 견지동 카프 회관에서는 매일매일 새로운 문예 운동의 방향과 목적을 어떻게 수립해 갈 것인지를 두고 격정적인 논의가 벌어지게 된다. 결국 새로운 강령 채택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초안을 심사하며 총회를 통해 카프의 방향전환을 대내외에 공포하기로 한다.
1927년 9월 1일 카프의 재조직을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1. 봉건적, 자본주의적 개념의 철저한 배격을 기함, 2. 전제적 노력과의 항쟁을 기함, 3. 의식층 조성 운동의 수행을 기함이었다. 그 외 주요 도시 및 도쿄에도 지부를 두기로 하였으며 기관지 『예술운동』을 발행하되 그 책임을 도쿄지부에 일임했다. 이는 『제삼전선』의 제작과 배포를 통해 서울의 출판 환경을 볼 때 도쿄에서 출판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윤기정은 명시적으로 카프의 지도부에 입성했다. 13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경성을 대표했다. 그리고 서기국과 출판국을 책임졌다.
1927년 9월 말, 윤기정은 카프 기관지 『예술운동』의 발간을 위해 원고를 모아 카프 동경지부로 보냈다. 이렇게 보낸 원고는 그 해 11월 15일 도쿄에서 출판되었다. 얼마 후 이 잡지는 서울로 보내졌다. 『예술운동』을 받아 든 윤기정은 이 잡지가 일제에 의해 압수당하기 전, 시내 주요 서점에 배포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연구생으로 있던 임화, 김유영 등을 불러 모아 『예술운동』을 서점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카프의 회원으로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은 가슴에 묵직한 책임감 같은 것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비장한 심정으로 이 잡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한 이들은 밤을 틈타 은밀히 시내 주요 서점으로 『예술운동』을 배달했다. 1933년 임화는 『조선일보』에 게재한 글에서 이날 차가운 겨울밤공기를 헤치며 『예술운동』을 배달할 때의 기분을 “히로익한 감정이 가슴에서 굽이치는 것 같았다.”라는 표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