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이면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내 것이 분명한데도 감당이 안 되고 조절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감정. 신나고, 즐겁고, 행복한 감정은 굳이 끌어 내릴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즐기고, 온전히 느끼면 되니까.
늘 나에게 어려움을 안기는 건 부정적인 감정들이다. 서운함이나 질투, 시기, 분노, 열등감, 좌절감, 패배감 같은 감정들에 사로잡히면 본능적으로 이것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해치우려 한다.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린 방법은 오히려 그것을 더 깊은 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었다. 일부러 혼자를 자처하고, 그 감정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부러 찾았다. 찾고 나면 내가 그 감정에 질릴 때까지 또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소진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그 안에 나를 가뒀다. 수치가 몇이었든 그 감정이 디폴트 값으로 돌아오는 순간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그땐 그게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 나이가 들며 이것들이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수준으로 정도가 심해진 건지, 이전의 방법에 내성이 생긴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내가 써먹던 나만의 처방이 더 이상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을 찾는 것에도 지친 걸까. 어쩌면 최선의 방법을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만 요즘의 내가 쓰는 방법은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전보다 있는 그대로 나의 감정 그 자체를 인정한다는 면에서 좀 더 성숙해진 방법이라 볼 수도 있고, 정반대로 오히려 나의 것을 무신경하게 방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근래에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그 감정을 느끼는 순간 나의 사고회로는 100m 달리기를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스프린터처럼 상대와 나의 서로에 대한 감정을 내 기준에서 임의로 재단하고, 양쪽 중 나의 감정이 더 컸다 확진하고, 그 결과 이런 서운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며 매듭지었다. 그리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도 이 관계를 그냥 그 정도 선에서만 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모든 과정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는데 문제는 그 어디에도 ‘분명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이 순식간을 이끌어 간 것은 나의 상상과 나의 주관이 섞인 판단, 그 뿐이었다. 실은 그 사람과 나의 표현방식이 달라서일 수 있는데, 실제로 마음이 더 큰 쪽은 그쪽일 수도 있는데 서운함이란 감정에 홀려 이성을 잃은 나의 정신은 재단에서 다짐까지 모든 과정을 나의 상상과 판단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언제쯤이면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