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4월
서점을 나서며 유미는 눈물을 닦았다. 김 교수님이 살해당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로수에 기대 잠시 숨을 골랐다. 멍하니 지나치는 차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정유미입니다. 지금 만나고 싶습니다.”
김 교수의 친구는 윤세오만이 아니다. 오영미도 있다. 어쩌면 오영미가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유미는 한달음에 사무실로 찾아갔다.
“김 교수님이 살해당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윤세오 씨를 알고 계시죠?”
오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라니. 유미는 자신이 한심했다.
“왜 그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으셨어요?”
“유미 씨를 위해서입니다. 상대가 위험한 자들이라 너무 깊이 파고들면 다칠 수 있으니까요.”
세오녀의 비단을 둘러싸고 테러와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었다. 조사자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오영미는 일을 나눠 맡겼다.
“김 교수님이 정말 살해되신 건가요?”
“가족의 허락을 받아 부검을 의뢰했습니다. 호흡곤란으로 인한 질식사지만 산소호흡기가 멈춘 적이 없고 코와 입을 막거나 목을 누른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부검의도 병으로 돌아가셨는지, 살해당하셨는지 명확한 소견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부검의 소견이야 어떻든 젊어서 물고문을 당해 기도 폐색으로 고생하시는 분을 숨을 막아 죽게 했다는 상상만으로도 유미는 몸서리를 쳤다.
“평소 협박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것까지 알면 유미 씨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한참을 망설이던 오영미가 입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 친일파가 사라진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세력을 키워왔지요. 친일파들은 신군부 시절 새롭게 조직을 정비했습니다. 일본 우익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키웠고 한국을 다시 병탄 하려는 장기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한국을 다시 병탄 하려는 일본 우익과 그들에 협조하는 친일 세력이 존재한다는 말에 유미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에게 한 짓을 다시 반복하려 하고 있어요. 언론 장악, 역사 왜곡, 마지막은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는 것이에요.”
“지금 시대에 그게 가능한가요?” 믿기지 않았다.
“여러 움직임이 있지만 우선 하나만 말할게요. 만약 한글의 원류가 되는 글자가 일본에서 발견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도 고고학적 증거와 함께.”
“그게 가능할까요?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있는데요.”
“일본의 여러 신사에서 고대 문자로 쓴 비석이 발굴됐어요. 일본에서는 이 고대 문자를 신대문자라고 부릅니다. 신들이 다스릴 때 사용하던 문자라는 뜻이에요. 그러자 천황 중심의 신도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신대문자를 일반인에게 보급했어요. 신대문자는 모양이 한글과 비슷해요. 이 때문에 그들은 한글이 일본에서 전파된 신대문자를 모방해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유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일본의 신대문자를 모방해 한글을 만들었다니.
“그런데 세오녀 비단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신대문자가 쓰여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오녀는 한국 사람이지만 비단은 일본에서 신라로 왔어요. 일본에서 한국으로 글과 문명을 전달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거예요.”
“정말, 세오녀 비단이 존재하나요?”
“네. 존재합니다.”
“어디에 있는데요?”
“일본에 있다는 것만 압니다. 서 시인은 세오녀 비단을 찾으려고 일본에 갔습니다. 만약 서 시인이 비단을 찾았다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겁니다.”
설명을 듣자 전체 윤곽이 그려졌다. 서리하는 오영미의 연인이자 세오녀 비단의 단서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와 김민철 교수는 지금까지 계속 서 시인의 행적을 좇았습니다. 일본에도 몇 차례 다녀왔지요. 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 시인의 시가 인터넷에 나타났을 때 유미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인터넷에서의 일이라 젊은 사람이 나을 것 같고 새로운 방법도 찾아낼 것 같아서요.”
“윤세오 씨는 이 일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김 교수와 역사 바로 세우기, 한글학회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서 시인을 찾는 일도 함께했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서 시인을 찾던 동료 두 사람이 실종돼 몇 달째 연락이 없습니다. 신고했지만 경찰이나 검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권에 이 사건과 연루된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삼대목이라는 사이트는 어떤 관련이 있나요?”
“김 교수의 운동권 선배 최원근이라는 분이 운영하는 사이트입니다. 대기업 임원으로 퇴사한 후 아마추어 시인을 돕고 싶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김 교수가 서 시인에 관해 물었지만 그분은 알고 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김 교수님이 언어 왜곡 숙청단과도 관련이 있나요?”
“그쪽은 전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인지? 왜 그런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유미가 오영미를 만나고 있을 때 원석은 통계 프로그램을 바꿔 서리하와 연오랑의 관계를 분석했지만 새로운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원석은 자신이 무엇을 놓쳤나? 무엇을 더 추가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고민 끝에 삼대목에 올라온 모든 시를 프로그램에 넣고 돌려보았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연오랑 외에 서리하와 일치율이 높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하는 생각에 연오랑으로 기준을 바꿔 검색해 보았다. ‘소모는 노인’이라는 아이디의 글이 71퍼센트로 높게 나타났다. 기대감을 가지고 서리하 시인의 글과 소모는 노인이 올린 글의 상관성을 따져보았지만 일치율 16퍼센트에 불과했다. 여기서 또 막혔다.
원석은 모니터 두 대에 연오랑과 소모는 노인의 글을 열어놓고 댓글을 단 사람을 비교해 보았다. 눈에 띄는 아이디가 있었다. 처용이란 아이디였다. 처용은 양쪽 모두에 댓글을 달았다. 주로 시비조 내용이었다. 아이피를 추적해 보니 중국이었다. 추적을 피하려고 중국을 우회한 듯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유미에게 원석이 처용이 올린 시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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