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시소설 23화

한국 사람

- 1984년 11월

by allwriting

서리하가 신영지에게 외쳤다. “형, 도화지와 크레용 주세요. 빨리.”

“크레용은 없고 수채화 물감은 있다.”

“아무거나. 빨리. 색만 칠할 수 있으면 돼요.”

신영지가 다급하게 스케치북과 물감을 가져왔다. 서리하는 가장 먼저 꽃술 부분에 있던 기호를 적었다. 마리가 한 장씩 나눠준 반원은 모란꽃 모양을 자른 것이었다. 꽃잎의 구부러진 선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물감을 풀어 꽃잎을 빨강, 자주, 주황, 노랑, 미색으로 칠했다. 안쪽 세 개는 빨강, 자주, 주황색으로 그렸다. 다 그린 다음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며 빠뜨린 것이 없는지 점검했다.

서리하가 스케치북을 내려놓자 신영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세오녀 비단을 봤어?”

“네. 이렇게 그려져 있었어요.” 서리하가 방금 그린 그림을 가리켰다.

“정말 세오녀 비단이 있었다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해독해야죠. 모든 기호를 알았으니 이제 해독할 수 있어요.”

서리하가 감춰져 있던 가운데 꽃술 부분을 보며 말했다. 꽃술은 검은색 기호 다섯 개였다. 서리하는 가운데 다섯 개 기호가 무엇인지, 왜 검은색인지 알 것 같았다. 검정은 모든 색이 섞인 색이다. 다채롭게 칠해진 꽃잎 부분은 색에 따라 기호 사용이 제한된 반면 검정은 모든 기호와 어우러질 수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자연스럽게 ‘아 에 이 오 우’라는 다섯 모음이 떠올랐다. 같은 색으로 칠해진 큰 꽃잎과 작은 꽃잎은 유사한 계열의 자음이다. 아마 작은 꽃잎은 된소리 거나 거센소리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서리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탄성을 터뜨렸다.

“왜 그래? 동생.”

“형, 이제 알 것 같아요.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요.”

“정말 좋은 소식이다. 고생했다.” 서리하의 등을 다독이는 신영지의 목소리도 흥분으로 떨렸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어디서 본 거니?”

“죄송하지만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말하지 마라.”

마리가 가져왔으리라 추측했지만 신영지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내용이 노출됐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면 서리하를 비롯해 관련된 사람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비단까지 다시 사라질 수 있었다. 세오녀 비단은 신라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이 만들었지만 일본과 무관하지도 않았다.


서리하가 회사에 출근하자 마리가 반겨 맞았다.

“왜 벌써 나오셨어요? 완전히 나은 것 같지 않은데.”

“오늘 저녁 시간 있으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서리하가 먼저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시간 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기대되네요.” 마리가 소녀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샤부샤부 집으로 갔다. 서리하에게는 솥에 넣어지는 야채가 모음, 고기와 어묵이 자음처럼 보였다.

“말 안 해요?” 미소 띤 모습으로 서리하를 지켜보던 마리가 물었다.

“네? 무슨 말?”

“할 말이 있어 저녁 같이 먹자고 한 거잖아요.” 마리가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세오녀 비단의 글자를 해독하셨어요?”

서리하는 여지를 두고 대답했다. “네. 어느 정도까지는...”

“해독 방법을 알려줄 수 있어요?”

“아직 부정확합니다. 비단 원본을 봐야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원본을 달라는 말씀이네요?”

“잠시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마리가 허공을 보며 침묵했다.

“마리 씨도 한국 사람이지 않습니까. 세오녀 비단은 한국 것인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강탈해 간 것입니다. 문자 체계도 우리 조상들이 만든 것이고요. 세오녀 비단을 되찾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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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화재 영업교육센터장/ IGM 강사, 마케팅본부장/ 13권의 책 출간/회사 문서, 자서전 등 글쓰기 강의/ 세일즈, 마케팅, 협상 강의(문의: hohot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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