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8월
“등산 가는 줄 알겠다.” 등산 가방을 메고 나온 유미를 보고 원석이 웃으며 말했다.
“몸을 가볍게 해야지.” 뒷좌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유미는 원석 옆에 앉았다.
“그러니까 일단 인천공항 쪽으로 가잔 말이지?”
“응.”
지난번 만났을 때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그만큼 둘은 친해졌다. 차가 달리는 동안 유미는 따라오는 차가 없는지 뒤를 살폈다. 차는 영종대교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유턴했다.
“따라오는 차는 없었어?”
“지금까지는 없는 것 같아.”
부산으로 가서 부관페리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공항 쪽으로 간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부산으로 가는 동안에도 원석은 가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달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페리를 탈 때까지 특별한 일은 없었다. 부관페리, 일본에서는 관부페리라 부르는 이 배는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간다.
배는 밤에 현해탄을 건넜다. 현해탄(玄海灘)은 한자 그대로 우리 민족에게는 ‘얕고 검은 바다’였다. 쉽게 건널 수 있었지만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바다를 건너 도시샤 대학에 유학 간 윤동주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고문을 당해 참혹하게 죽었다. 물거품을 일으키며 따라오는 물결을 보면서 유미는 일제강점기 시인들을 떠올렸다. 윤동주, 이상, 정지용... 그들은 깜깜한 암흑 속에서 이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암울한 시대에 시를 읊다 속절없이 죽었지만 시는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졌다. 어쩌면 시는 자유의 다른 이름인지 모른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일제의 폭압에 맞서 악착같이 시를 썼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유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쿄가 아닌 규슈로 행선지를 잡은 것은 서리하가 마지막 머물던 요양병원이 규슈에 있고 연오랑, 소모는 노인의 아이피 발신지도 대부분 그쪽이었기 때문이다. 배를 통해 자잘한 밀수가 성행해서인지 세관 검사가 엄격했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해 영어로 대답하자 이번에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 세관원이 쩔쩔매다 다소 거친 손짓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원석은 곧바로 따라 나왔다.
“야, 너 영어 잘한다.”
“요새 영어 못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냐? 그런데 원석 씨는 왜 그렇게 일본어를 잘해.”
“먹고살려고 배웠지.”
일본 회사 일을 하면서 원석은 일본어를 배웠다. 시간이 나면 일본에 가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본어를 익혔다. 도쿄는 서울과 비슷해 금방 싫증이 났다. 지형이나 사는 모습이 일본색이 짙은 규슈가 더 마음에 들었다.
“이 근처 구경할 데 있어? 택시를 타고 어디든 가.”
미행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말귀를 알아들은 원석이 정류장에 서 있는 택시를 탔다.
“유메노타와, 오네가이시마스(부탁합니다).”
“유메노타와가 어디야?”
“유메는 일본말로 꿈, 타와는 타워의 일본식 발음. 전망대야. 시모노세키 전경을 볼 수 있어.”
“그런데 뒤 차 우리 따라오는 거 아냐?”
사이드미러로 뒤를 본 원석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택시가 유메노타와에 멎자 따라오던 차도 멈추더니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리자 사내가 원석과 유미를 보고 멈칫하다 둘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다른 데로 갈까?”
“아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꼭대기에 올라가 보자.”
입술을 앙다문 원석이 입장권 판매 창구로 갔다. 앞서 입장권을 산 사내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한 층 계단 위에 전망대가 있었다. 경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를 노려보던 원석이 가까이 갔다. 원석이 일본어로 뭐라 하자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원석이 막아서자 사내가 가슴을 밀쳤다. 눈치를 살피던 사내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 하강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뭐라 그랬는데?”
“누구냐고? 왜 우리를 따라오냐고?”
“그랬더니?”
“따라온 적 없대.”
둘은 한동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모노세키를 감도는 해협은 커다란 물음표처럼 생겼다. 이 좁은 해협을 통과한 배는 일본인이 내해(內海)라고 부르는 바닷길을 따라 오사카에 이른다.
“우리 너무 과민한 거 아냐?”
말하는 투나 태도가 일반인처럼 보였다. 다행히 사내가 신고하지 않았는지 전망대를 나오는 동안 별다른 소동은 없었다.
택시를 타고 둘은 예약한 호텔로 갔다. 안전을 위해 방 하나를 같이 쓰기로 했다. 트윈이지만 일본 호텔은 방 크기가 작았다. 젊은 남녀가 저녁부터 좁은 방 안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해 식사도 할 겸 밖으로 나왔다.
“첫날이니 푸짐하게 나베요리 먹자.”
“나베요리?”
“나베는 우리말로 냄비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냄비에 끓인 음식이란 뜻이고 샤부샤부 비슷한 음식이야. 일본 스모 선수들이 먹는 음식이라는데 비싸긴 해도 풍성하고 맛있어.”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 골목에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원석이 유창한 일본어로 음식을 주문하자 잠시 후 나베요리가 나왔다. 야채와 두부, 생선을 넣어 끓인 게 한국 음식과 비슷해 유미는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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