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4월
눈을 뜬 이 교수는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알았다. 어둠 속에 스타킹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 안 가득 종이를 쑤셔 넣고 재갈을 물렸다.
“이 자는 말과 글로써 민족을 배반하고 더러운 일본 돈을 지원받으며 매국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구체적인 범죄 사실로는 어용 언론에 군사 독재자를 미화하는 칼럼 7편,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논문 5편...”
등 뒤에서 자신의 죄를 열거하는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친일 사관을 옹호하는 연구 단체를 만들어 제자를 양성하는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출 활동을 했다고 허위 사실을 기록한 책을 버젓이 출판했습니다. 방송에 출연해서도 후안무치하게 거짓 사실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상, 이용안의 죄를 열거했습니다. 구형하십시오.”
구형하라는 말이 나오자 이 교수를 둘러싼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다.
“사형.”
“사형입니다.”
“왜곡된 글을 쓴 손가락 열 개 절단.”
“손가락 전부 절단.”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이용완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판결하겠습니다. 죄는 무거우나 이런 자가 나오는 것은 일제 강점기 후 역사를 정화하지 못한 상황 탓도 있습니다. 이번 한 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기회를 주고, 이 자를 보는 다른 범죄자들이 두려움을 느끼도록 목숨만은 남겨두겠습니다. 손가락 열 개 절단으로 판결합니다. 이후에도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면 사형시키겠습니다.”
몸부림쳐도 소용없었다. 목에 주삿바늘이 꽂히고 이 교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양손을 붕대로 감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잘린 손가락이 없어 접합수술을 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양손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이 교수를 병원 응급실 앞에 던져놓고 갔다. 시시 티브이로 확인하니 번호판을 가린 검은 차였다. 선팅을 진하게 해서 차 안은 보이지 않았다. 이 교수 입에서 종이 한 뭉치가 나왔다. 그가 쓰고 있던 원고였다.
엽기적인 사건은 곧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 교수 제자를 비롯해 같은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비분강개하는 목소리를 터뜨리고 광화문에서 범인 검거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범죄자를 비난하던 제자 두 명의 손가락이 잘리자 시위는 수그러들었다. 경찰청에 특별수사팀을 꾸려 범인을 추적했지만 변변한 단서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언어 왜곡 숙청단’ 명의의 성명서가 신문사로 배달됐다. 성명서가 발표되자 언론이 다시 들끓었다. 우익 언론에서는 숙청단을 좌익용공 세력으로 몰아갔고 진보 언론에서는 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일 사관과 언어 정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숙청은 계속됐다. 숙청단을 좌익용공 세력으로 몰아가던 언론인이 손가락과 성대를 잃었고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는 글을 쓴 교수에게 손가락이 든 협박 편지가 날아들었다.
유미도 기사를 봤다. 폭력을 용인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성명서 사진을 살펴보던 유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탕에 희미하게 그림이 보였다. 사진을 확대해도 모양을 알 수 없었다. 유미는 원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새입니다. 특이하게 다리가 세 개네요.”
‘삼족오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연이어 서점의 문고리가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윤세오가 숙청단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모종의 관계가 있을 듯싶었다. 직접 찾아가 묻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미가 비밀을 안다면 손가락을 자르고 사람을 살해하는 자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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