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는 어디에나 있다. 분명 온 나라가 한, 두 동네 정도는 베네치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동양의 베네치아, 한국의 베네치아, 부산의 베네치아... 유럽 동네도 다를 건 없다. 북구의 베네치아(스톡홀름), 심지어 운하의 도시 네덜란드에서도 베네치아(히트호른)가 있다. 웬만한 운하를 끼고 있는 동네는 다 베네치아다.
늦은 오후 공항에 도착해 본섬으로 들어간다. 이미 오후 6시가 넘는 시간, 사람들은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하고 강가의 희미하고 오래된 가로등이 켜진다. 과연 물의 도시라 불릴만하다. 네덜란드가 육지에 가로, 세로의 운하를 뚫었다면, 베니스는 그야 물 위에 도시가 있는 것 같다.
누가 감히 하늘이 파랗다 했을까. 태양이 온 섬을 아주 채도가 높은 주황빛으로 물들이다, 해가 얼추 넘어갈 때 마지막 빛을 쥐어짜 낸다. 그러다 하늘이 분홍빛으로, 보랏빛으로. 그렇게 저녁 빛으로 도시가 스며든다. 노을이 지고 어스 푸르무레한 하늘에, 수많은 다리 중 한 개에 서서 풍경을 보고 있으니, 가로등 불빛에 만들어진 연약한 윤슬과 물결에 흔들리는 정박되어 있는 보트들.
화려한 중세 시대의 의상과 헤어를 하고, 파트너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니는 한 무리의 귀부인들이 계시는데, 이들은 아마 베니스 혹은 이탈리아 어느 지역의 노부부와 그들의 친구들일 것이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부탁에 같이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어주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시 가던 길을 가다, 어느 백작가 신사로 분장한 남편이 아내의 길고 풍성한 치마를 정리해 준다.
대여한 옷이 아니더라도 초콜릿 봉지로 멋스럽게 직접 만든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셔터 세례에 손을 흔들어주던 어느 모 지역의 어머니회도 있다. 나이가 들며 설자리가 없어지는 내가 속한 사회에 반해, 시간이 지나더라도 늘 내 손을 잡아주고, 나이답지 않은 짓궂은 장난에 기꺼이 함께 해줄 이가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라.
K-POP 덕분인지, 남인지 북인지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끄덕이며 알아준다. 나는 이웃나라와 다른 문화를 가진 KOREAN이라고 덧대지 않아도, 이제는 제법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해주기도 한다.
마르코 폴로 사후 7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의 카니발은 'To the east'의 주제로 포문을 연다. 중국식 배경의 무대에, 행사 진행자는 영의정 의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실크로드 어느 부족의 전통 연주가 시작된다. 이 위화감은 나만 느끼고 있는 건지. 어찌 보면 큰 범주의 '동양문화'이니 틀린 것도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문득. 타 문화인들이 한복(韓服)과 한푸(漢服)를 구분하고, 된장과 나또를 식별하며, 공수(拱手)와 합장(合掌)의 차이를 알까. 같은 문화의 뿌리를 공유하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한국적이고, 독창적이며, 고유하게 특정할 수 있는 것은.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만난 알바니아인 유학생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데, 이제는 일본어 회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본인은 이제 일본어에 대해 더 깊게 배우고 싶다더라. 아시아문화를 흥미로워하는 그의 "한국어는 일본어와 좀 다른가?"라는 질문에, 간결하고 담대하게 대답했다. One and Only. 당신의 백성이 가엽다며 당신께서 언어를 창제하였는데, 어찌 그저 '좀' 다를까.
하지만 베네치아는 어디에도 없다. 에메랄드빛 물 위에 곤돌라들이 살랑거리며 부딪히는 베네치아가. 자릿세를 요구하는 베니스의 상인들과, 자릿세를 피하고자 손에 스프리츠(Spritz) 한 잔을 들고 가게 울타리에 기대어마시는 사람들이 있는 베네치아가. 나조차 관광객이면서도, 오버투어리즘이 마땅히 이해가 되는 베네치아가. 일상의 시선에 벗어나 가면 속에 자아를 숨기는 이 카니발에선 이방인은 없다. 이 베네치아 속에서 완전한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