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마트에서 생수 1.5L짜리를 사고 그냥 숙소로 들어가려다, 그때 문득 본 하늘 저편에서 해가 지고 있더라. 그래도 가던 길을 갈까 하다가. 더 이상 미련을 남기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어떤 것이든지 영원한 계속이란 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래서 뛰었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거추장스러운 생수병을 두 손으로 안아 들고 다시 그 언덕길을 올랐다. 뼛속부터 길치인 나 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 동네였기에 가고자 하는 길에 망설임은 없었다. 조바심이 났다. 이미 하늘은 보니 주황빛도 아닌, 그렇다고 분홍빛도 아닌 선홍색으로 물들어갔다. 구름이 몰려온다. 내일 비 소식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보다. 빠른 잰걸음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이러다 해가 다 넘어가겠어. 마지막 코너를 돌았을 땐 아, 여기가 아니구나. 해가 지는 곳은 반대편 너머구나. 다시 서둘러 반대편으로 향했다. 숨이 찼다. 나의 머뭇거림 때문에 또 미련이 남을까. 나는 또 미련하게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걸까. 하늘에 어두운 색감들이 덧씌워지기 시작한다. 지도도 없이 하늘만 보고 가는 방향에, 건물들이 길을 막는다. 무지개 끝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게 이 기분일까. 너무 늦지 않길 바라.
열린 철문 사이로 무작정 들어간 곳은 어느 한 작은 공원이었고, 이미 삼삼오오 사람들이 한 손에 맥주 한 캔씩 들고 걸 터 앉아, 구름 사이사이 드문 보이는 오색의 빛에 취한다. '후'. 짧은 숨을 돌아 쉰 뒤, 그동안 들고 다녔던 생수통을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너는 이 쓸모를 위함이구나.
유럽 생활에도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건, 짐 한가득 들고 밤거리를 이동하는 것이다. 코트 자락을 스치는 따뜻한 춘풍에 새삼 더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자각이 든다.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 희미한 불빛 하나도 없는 거리를 부산스럽게 걸으며, 거리의 분위기가 영 별로라고 괜한 불안감에 불평하다가. 시내로 겨우 들어설 때, 열린 철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불빛에 무심코 들여다봤다.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손히 모은 두 손에서 경건함이 느껴진다. 부활절 연휴 기간인지, 그리고 내일이 부활절이라 그런지 저녁 늦게까지 미사가 진행 중이다.
존재를 믿지 않고, 거대한 배낭을 메고 있는 이방인이 차마 문턱을 넘지 못하고 그 뒤에 서서 조용히 지켜봤다. 누구도 막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 겨우 단어 조금 말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꼬마 아이가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아니야, 나는 여기가 충분해. 나는 이 뒤에서 너희의 축복을 빌어줄게.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고 다음 날 아침. 태양 아래 밝은 빛으로 비친 파스텔톤의 건물들과 오밀조밀하게 길거리에 장식되어 있는 이스터에그들. 여행하면서 어떤 도시는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으나,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빌뉴스는 햇살이 사랑하는 도시이다.
이 이야기는 그들의 의지다. 그들의 결연이고 투쟁이며, 과거엔 아픔이었으며, 곧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연대다. 세 나라 모두, 거리를 걸을 때마다 한 건물 건너 파란색과 노란색의 국기가 걸려있었다. 어쩔 땐 자국 국기보다 자주 보였던 거 같기도 하다. 탈린에서는 시청 건물을 뒤덮을 만큼의 아주 큰 국기가, 리가에서는 달리는 트램과 버스 곳곳에, 빌뉴스에서는 식당과 가게마다의 문 앞에 지지 선언과 표시가.
불규칙적으로 색이 다른 돌바닥은 과거에 이 자리에 영광스러운 교회가 있었다는 걸 증명한다. 한 건물이나 왠지 느껴지는 위화감은 폭탄에 의해 소실된 반쪽이라, 새로 완공된 나머지 반쪽의 건물과 시간의 격차가 느껴진다. 89년 8월 23일, 역사상 가장 긴 인간사슬 (자유의 사슬)이 그들의 결연을 증명한다. 세 개의 나라를 가로지르는 이 인간사슬은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현재, 과거의 아픔을 뼈저리게 알기에, 핍박과 억압의 시간을 겪었기에. 완전하고도 온전한,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우크라이나의 해방과 자유를 지지한다. 우크라이나 국기가 나란히 걸려있는 올드타운을 진득이 걷는다. 그러다 즉흥적으로 참여하게 된 워킹투어에서 우리 못지않은 수많은 시대의 변곡점이 오늘의 도시 흔적에서 묻어 나옴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와, 간절했던 자유를 위한 기념비.
발트 3국이라 불리지만 이 세 나라는 각각의 민족이 다르고, 고유한 언어가 있으며 종교도 구별된다. 끈기를 가지고 있는 민족, 냉철한 이성을 중시하는 민족 그리고 높은 자부심과 과감함을 지닌 민족, 이라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선입견은 접어두기로 한다. 세 나라에서 워킹투어에 참여하며 알게 된 분명한 것이 있다. 3국 모두가 어두웠지만 긍지 높았던 그 시대를, 굴하지 않고 결국에는 극복해 내었다는 것이 곧 그들의 자부심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동력이다.
이 이야기는 굳건히 우크라이나 곁에 서 있겠다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