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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스 May 14. 2023

당일치기 도피

“이번주에는 어디로 갈까?”

지난 3개월 간 수요일 또는 목요일 저녁마다 받게 되던 문자가 있다.


친구와 나는 베네치아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감정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삶의 터전이지만 극히 관광지인 베네치아, 별일 없는 일상도 이곳에서는 전부 극적이다. 온갖 국제 행사와 지역 축제가 골목 곳곳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속도를 따라잡기에 늘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베네치아 생활에 적응하는데 이상하리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도시에 이렇게까지 압도된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반년이 지나갔다.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 이토록 무기력한 것이 억울해졌다. 삶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 공강인 금요일마다 근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애증의 베네치아

여행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매주 친구의 문자를 시작으로 서로에게 그 주간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간단하게 업데이트하며 여행할 의향이 있는지를 표현한다. 둘의 의사가 일치한다면 해당 주 금요일의 날씨, 기차표의 가격 등 여러 고려사항을 즉석에서 확인해 본다. 수요일에 문자가 온다면 조금 더 계획을 요하는 장소로, 목요일이라면 지역기차 노선 내에서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장소로 선택한다. 조건이 맞는 여러 후보지를 추려내고 의견을 교환한 후 결정을 내린다. 보통 친구가 도시를 선택하면 나는 여행지에서 가고 싶은 곳을 제안하는 식이었기에 꽤 공평한 여행이었다.


우리의 여행은 항상 당일치기였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밤 12시가 되기 전 돌아오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어디를 가든 꼭 박물관, 유적지, 또는 교회와 같이 지역의 역사가 진하게 담긴 장소를 선정하여 방문했다. 


여행 중에는 사진을 집착적으로 찍었다. 작은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길거리의 벽화나 표지판부터 시작해서 박물관의 작품들까지,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요소를 발견하면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 가로로 세로로 다양한 각도에서 열심히도 찍었다. 잘 찍지도 못하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sns에 올렸다가 지웠다가 아카이빙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다녀온 곳에 대해 곧장 잊어버렸다.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을 사진들이 늘어갔다.


여행이 삶의 방식이 되어갔다. 사실 어디론가 떠나지 않아도 삶 자체가 그러했다. 아주 특별한 장면들이 일상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 과정이 즐거웠는지 불안했는지 잘 모르겠다. 복잡한 마음을 당일치기로 모른 척했지만 돌아오면 여전히 나였다.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가 나를 헷갈리게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

입 밖으로 꺼내기 조심스러운 고백이 있다. 배부른 소리 같아서. 그런데 나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적어도 지금은.

지금은 불확실성이 주는 짜릿함 보다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이 간절하다.


이 여정은 2월 첫 금요일 사랑의 도시 베로나로 시작해서, 트레비소, 바사노델 그라파, 포사뇨, 트렌토, 라벤나를 거쳐 5월 첫 금요일 시골마을 산비토에 위치한 브리온 묘원으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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