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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스 Nov 03. 2023

그리운 마음이 향하는 곳

할머니와 재회할 순간을 고대하며 한국에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아프셔서 종합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이동하실 때 간신히 한번 뵈었다. 병실 방문이 불가능했기에 멀찍이 인사만 나눴다. 할머니는 저 멀리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 눈을 또렷이 마주치시며 브이자 모양의 손가락을 힘껏 흔드셨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 영원히 살아계실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는 할머니를 떠올리면 하나의 감정만이 지배했다. 당시 상황에 따라 섭섭하기만 한 때가 있었고 애틋하기만 한 때도 있었다. 그토록 강렬했던 하나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졌는데, 연민 사랑 원망 후회 고마운 마음 얼룩덜룩 일정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며 할머니와 가족 간의 복잡하게 쌓여갔던 맥락을 돌아보는데 이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 'Abstracted/Family'가 떠올랐다. 한 인터뷰 중 주인공은 용서하는 일은 사람의 능력을 너머서는 일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잊는 것뿐이라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잃은 그는 아마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고자 무의식적으로 노력한 것 같다고 고백했다. 다큐를 볼 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잊어야만 삶이 수월해지는 기억, 잊어야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분명히 있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부정적인 기억은 모두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와의 기억을 아름답게만 편집하지 않아도, 미웠던 순간을 잔뜩 떠올려도, 더 이상 밉지가 않아 졌다. 오히려 기억할수록 사랑하게 되었다. 할머니를 향한 마음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순해졌는데... 그것은 그리움!

맞춤법 하나 맞지 않던 삐뚤빼뚤 손글씨, 자주 입으셨던 연분홍색 꽃무늬 셔츠, 사위와 장난을 주고받으실 때 짓궂게 올라갔던 입꼬리, 통화에 끝마다 건강. 평화. 최고를 외치셨던 힘찬 목소리가 전부 그리워졌다. 많은 순간이 모래처럼 사이사이 빠져나가겠지만, 최대한 많이 기억하고 싶어졌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아니라고 대답해 왔다. 그리움을 품고 있으면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곁에 없는 대상을 그리워하면 나의 독립성이 위협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운 마음이 찾아와도 애써 방치했다. 굳이 그리워해야 한다면 된장찌개와 곤드레밥 정도만 그리워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나의 그리움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를 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미련이 아닌 지금 살고 있는 순간을 잘 나누고 싶은 욕망에 가까워진다.


앞으로 그리운 마음이 찾아올 때면 좀 더 환영하고 알아차려주고 싶다. 기억에서 도망가지 않고 거듭하여 곱씹다 보면. 혹은 그저 기다리다 보면. 다르게 느껴지는 날이 오기도 한다. 결국엔 그저 지금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기쁨과 슬픔에 이리저리 얽힌 채로 내 속에 살아있을 지금들. 나는 열심히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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