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호젓하게 자리 잡은 경북 영주. 아흔아홉 굽이에 내리막 30리 오르막 30리 소백산 죽령옛길은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했던 선비들의 많고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소백산 자락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화에 시선이 멈춘다. 따사로운 가을볕 아래 야생화가 자연의 섭리 오롯한 모습으로 객을 맞이한다.
“이번에 취재할 곳은 경상도야. 갈 수 있겠니?”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라 서울 근교 외에는 취재 다니기가 부담스러웠던 시기다. 허나 편집장님의 한마디에 채비를 갖추고 취재지로 향했다. 가을이란 계절에 흠뻑 취해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거다.
반짝이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달리다 보니 소금을 흩뿌린 듯한 메밀밭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속에 등장하는 서정적인 메밀밭이 강원도 봉평에만 있는 건 아니다. 지리적으로 강원도와 근접한 경상북도 영주 역시 메밀밭을 만날 수 있다.
선비들의 고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조선 세조 3년 때, 선비들의 유배지였다. 과거 척박한 땅에 뿌리기만 하면 쑥쑥 자라나는 메밀은 그들의 소중한 식량이 되어 주었다. 영주 순흥에서 메밀묵밥 파는 집이 종종 눈에 띄는 이유는 역사적인 배경과 맥을 같이 한다. 취재는 메밀묵밥 전문점, 소수서원, 무섬마을 순으로 잡았다.
첫 번째 취재 장소에서 사진기자를 만났다. 전통방식으로 가마솥에 메밀묵을 만든다는 곳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사진기자는 내부 인테리어와 외부 인테리어 촬영을 한다. 나는 안 그래도 바쁜 주인장을 졸졸 따라다니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음식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에 그의 손길이 필요했기에 인터뷰할 시간이 따로 나지 않더라. 원래 취재라는 것이 발로 뛰며 하는 것이 맞긴 한데 부엌까지 쫓아 들어간 건 돌이켜 생각해보니 무리수지 않았나 싶다. (끝까지 친절하게 응해주신 사장님 감사해요)
주인장은 마당 한 켠에 자리 잡은 아늑한 방앗간에서 메밀 손질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단다. 5시간 이상 불린 메밀을 껍질과 전분으로 분리한 후 치대면서 고운 묵을 만들어낸다. 기계가 아닌 가마솥을 고집하는 이유는 찰진 형태와 고소한 향을 내기 위함이다.
따끈하게 내온 메밀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수저로 푹 뜨면 부서질 것 같아 조심스레 살살 떠서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온기가 도는 메밀묵이 미끄러지듯 보드랍게 씹힌다. 한 입 한 입 천천히 음미하며 수저를 떴다. 고소한 향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간다. 만든 이의 정성을 알고 먹으니 내입으로 들어오는 메밀묵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잘생긴 메밀묵 한 사발에 주인장의 정성과 노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루에 3군데를 취재하려니 시간이 빠듯하다. 묵밥 집 취재를 마무리하고 서둘러 소수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이곳은 1542년 조선 중종 때 군수 주세봉이 백운동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고, 이후 퇴계 이황의 건의로 소수 서원으로 거듭났다. 지금으로 보자면 최초의 사립 대학교인 셈이다.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강학당, 많은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장서각, 유생들이 공부했던 기숙사 학구재와 지락재 등 선비 정신을 엿볼 수 공간으로 가득하다. 조선시대 산 교육장인 소수서원을 둘러보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눈에 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체험학습 나온 아이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무섬마을로 향했다. 무섬마을로 진입하는 외나무다리는 전래 동화책에 나올법한 모습이다. 가느다랗고 기다란 외나무다리 건너편에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마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반남 박 씨와 선성 김 씨의 집성촌인 이곳은 옛 모습 그대로 운치가 그윽하다. 이런 보물 같은 곳이 있었다니. 마을 사람들의 오랜 이야기가 담겨있을 외나무다리를 유유히 걸어본다.
석양이 더해진 고즈넉한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사진 기자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쉼 없이 들려온다. 사진기자가 바빠진다는 건 촬영할 거리가 많다는 얘기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서울이 한국의 전체인 줄 알며 살아왔다. 서울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인 건 맞지만 지역의 숨은 보석 같은 곳을 발견하게 될 때면 우리 조상의 얼과 한국의 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하루 동안 취재한 코스 그대로 아들과 함께 영주 여행 한번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사진=<바앤다이닝> 강현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