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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Jun 11. 2024

아들이 사춘기지만 여행은 계속 다니려고요

아이 기말고사가 한 달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맞이한 6월 황금연휴. 누군가 손꼽아 기다리던  연휴가 청소년이 있는 집에서는 조금 부담스럽다. 허나 나흘 동안 나는 삼시세끼 밥만 하고 아이는 학원-집을 도돌이표처럼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리하여 또다시 저녁 출발, 다음날 학원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오후에 돌아올 수 있는 가까운 곳을 찾아보았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청평 리조트에 마침 빈 방이 있어 얼른 예약을 하고 아이가 오길 기다렸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어딜 간다고요?”

“가까운 곳이야. 1시간 밖에 안 걸려. 잠만 자고 밥만 먹고 오는 거야.”     


입이 쑥 나온 사춘기 아이를 살살 달래 가며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여행보다 게임하며 쉬는 게 더 좋은 너의 마음 이해하지만 역마살 낀 엄마도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막상 가보면 좋아할 거면서.    


어두컴컴한 밤길을 내달리며 이것도 여행길이라 약간의 설렘이 느껴진다. 아이는 게임에 몰입 중이고 창문 너머 풍경이 낮이거나 밤이거나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밤 10시 반 정도 출발해 자정이 다 되어 청평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키를 받아 묵직한 철문 손잡이에 꼽아 돌린 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철문 소리와 함께 칙칙한 기류가 시선을 압도한다. 우리 가족은 왜, 무리하면서까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이곳에 온 것일까. 괜히 속은 기분이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뭐라 설명하기 힘든 난해한 분위기에 흐물흐물 힘이 빠진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체크아웃해야지.      


드디어 아침이다. 얼른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푹 잘 잤다. 커튼을 걷어 젖혔다. 응? 깜깜한 밤에 체크인을 해서 알 수 없던 마운틴뷰에 덜 깬 눈이 번쩍 뜨인다. 병풍처럼 둘러 쌓인 청평의 산세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화음을 넣으며 사이좋게 노래 부르고 있다. 초록색 나무들 사이로 노랑새가 날개를 펄럭거린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노랑 물감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촘촘하고 완벽한 색상의 노랑새를 눈앞 풍경에서 라이브로 본 건 처음이다.      


더불어 90년대 학교 앞 자취방 같던 체리색 리조트 인테리어가 갑자기 고풍스러운 앤티크함이 물씬 흐르는 듯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초록의 자연과 무척이나 잘 맞아떨어지는 인테리어다. 이런 내추럴한 고풍스러움이 다 있나. 잠만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8시간 만에 완전한 동상이몽이다.   


어젯밤엔 분명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시는 안 오리라 다짐했는데 사람 마음이 이리 갈대 같다. 맑은 공기에 취해 하루도 지나지 않아 기분이 싹 바뀐다. 예약을 다시 잡고 낮 시간에 도착해 노랑새 벗 삼아 고기를 구워 먹어야겠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체크 아웃 후 강을 지나 낮은 산길을 타고 카페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루프탑 자리가 있는 5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원하게 뻗은 한강뷰가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한강의 상류를 이루는 가평군 청평의 북한강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작가의 말씀처럼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아름다워진다는 한강의 진수를 감상하기 제격인 곳이다.  


북한강의 시작은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남쪽으로 흘러 강원도 철원에서 합쳐진 후 휴전선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다가 이곳을 거쳐 양평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한강의 줄기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을 바라보니 강물 안에 담겨 있을 수많은 역사와 서사에 웅장한 기운이 전해진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반나절 정도의 드라이브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면 양평 가는 길로 붙을 일이다. 가다가 또다시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릴지라도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붙어야 한다. 그래야 한강을 놓치지 않는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한강이 아름다워진다. 계절 따라 아름답고 지역에 따라 아름답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 ‘흐르는 강가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 사이에 자리 잡은 양평에서 가평까지 한강을 끼고 드라이브 코스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가끔 이 부분을 일부러 다시 찾아 읽어본다. 다음번 여행에서는 박완서 작가께서 추천한 운길산 수종사에 들려볼 계획이다. 그곳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느꼈을 감정선을 오롯이 따라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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