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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송인 Jun 27. 2022

자기분석으로서의 메모, 그 즐거움

2000년대 초반부터 블로그를 하며 틈틈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정리해 왔습니다. 중간중간 손을 놓은 기간도 길지만 2013년 무렵부터는 티스토리에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했고. 현재 비공개 글 포함 4441개의 포스팅이 쌓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써도 무언가 미진한 감이 많았습니다. 쓰고 나면 더 기억이 잘 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더군요.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겨도 몇 달 지나면 도대체 무슨 리뷰를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일상의 메모입니다. 일상의 수많은 생각 중 의미 있는 일부만이라도 잘 모아서, 모은 내용을 다시 보며 생각을 다듬는 보다 능동적인 습관을 들인다면, 휘발되지 않는 촘촘한 생각의 그물망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2021년 2월에 신정철이 쓴 메모 습관의 힘을 읽고 나서 시작됐습니다. 책에서 한 문단 발췌해 옵니다.


기록하는 사람의 삶에는 버려지는 시간이 적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시간을 살아도 일반 사람들보다 더 많은 날을 사는 듯한 효과를 누린다. 기록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표지만 있고 속은 비어 있는 책과 같다. 관찰하고 기록할 때, 우리가 만들어가는 인생이라는 한 권의 책은 반짝이는 일상의 페이지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엉성하게 채워져 있던 삶이 밀도 있게 변한다.


메모를 통해 삶이 밀도 있게 변한다니 정말 멋있는 말 아닌가요.


책 읽고 바로 수첩을 사서 메모를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바로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수첩에 기록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불편한 방식이었고, 무엇보다 공간을 조직화하여 사용하는 데 재간이 없는 데다 악필이기까지 한 제 개인 특성으로 인해 수첩에 기록한 내용에 애착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예쁘기라도 하면 그 맛에 다시 수첩을 펼칠 텐데 지저분하고 안 예뻤습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1월에 제텔카스텐을 읽고 나서 다시 메모에 대한 욕망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 책은 유기적이고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론을 이야기합니다. 글쓰기의 상향식 접근을 통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방식을 알려줍니다.


1000개의 메모를 목표로 주중 메모 두 개를 지속할 팀원을 모집하여 습관을 이어온 지 197일째입니다. 현재 294개의 메모를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주 1회 총 28편의 글을 썼습니다.


메모가 아직 충분히 모이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는 지식을 적극적으로 생산한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하지만 197일 동안 무슨 생각이 우선순위에 있었는지 확실하게 파악됩니다. 이와 관련한 제 옵시디언의 화면 일부를 캡처해 옵니다.



프리랜서로 여러 기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시간관리가 1순위를 차지했고. 역시나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불확실성과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글도 그런 쪽으로 많이 썼고요. 사소한 습관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했고, 사소한 습관의 주요한 두 축이 영어와 글쓰기(feat 메모)였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저는 이런 생각을 주로 하며 살았음을 누적된 메모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분석입니다.


또한 메모의 힘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메모의 대상을 나 자신으로 정하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깊이 있는 자기분석이 이뤄진다.[^1]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해놓은 노트를 다시 찬찬히 읽다 보면, 우리는 지난 생각 속에 일관되게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2]


자기라는 것은 결국 현재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가[^3]하는 점입니다. 과거가 좀 못나 보여도 괜찮습니다. 지금 자기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면 말이죠. 


메모는 자기분석적인 효과를 내면서 사고의 조망을 넓히고. 이를 통해 좀 더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다시 한 번 무언가에 전념해 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게 합니다.  




[^1]: 메모의 마법 / 마에다 유지 — 잔향

[^2]: 노트의 품격 / 이재영

[^3]: How changing your story can change your life. Lori Gottlieb - YouTube


이 글은 MarkedBrunch를 이용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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