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력은 고갈되는 자원이다.
유명한 심리학자 중 한 명인 바우마이스터는 자아고갈(ego-deple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하루에 쓸 수 있는 의지력이 정해져 있고, 자동차 연료처럼 의지력도 그것을 쓰면 쓸수록 고갈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수면이나 당 섭취 등과 같은 방식으로 연료를 다시 채우는 것이 가능하지만요.
30년쯤 전에 이러한 주장을 했고, 이후 수많은 연구결과가 자아고갈 개념을 뒷받침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자아고갈 개념에 의문을 제시하는 메타분석 결과가 나온바 있습니다. 이 메타분석에는 5개 나라의 24개 연구팀이 참여했습니다. 심지어 바우마이스터 본인도 자문 역할로 참여했습니다.
보다 최근 메타분석 결과는 다시 바우마이스터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지만 효과크기가 작아서 논쟁의 여지는 계속 있어 보입니다.
아니다. 정신적 노력의 과정에서 고갈되는 자원 같은 건 없다. 기회비용에 따라 주의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일 뿐이다.
의지력은 고갈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의지력이 고갈되었다는 우리의 생각이 실제 수행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바우마이스터도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자기 이론과 양립 가능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이론적 모델로 접근한 연구도 있습니다. 이 연구는 정신적 노력의 과정에서 우리가 지닌 자원이 고갈된다는 개념 자체를 부정합니다. 즉, 그릿(Grit) 연구로 유명한 엔젤라 덕워쓰(Angela Duckworth)가 참여한 2013년 연구는 고갈되는 자원으로서의 의지력이 아니라 기회비용에 따른 주의 배분의 문제라는 프레임으로 자아고갈 현상을 바라봅니다.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무척이나 피곤합니다. 그래서 아이와 놀아주기보다 혼자 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의지력을 발휘하여 놀아주려 해보지만 하품이 끝없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아이가 자러 가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면 정신이 말짱해집니다. 그리고 몇 시간씩 글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좀 부끄러운 개인적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의지력이 고갈되는 것이라면 몇 시간씩 몰입하여 글을 쓰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엔젤라 덕워쓰 연구는 기회비용과 주의 배분의 관점에서 이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일상의 수많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동시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문제도 산재해 있죠.
하지만 우리 뇌가 동시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용량에는 한계가 분명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현재 시점에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은 기회비용입니다. 기회비용을 계산하여 어떤 일을 더 우선시할지 결정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피로감(제 경우 아이와의 놀이)은 그 일보다 더 유익을 가져다 주는 다른 일(가령 글쓰기)이 있을지 모른다는 신호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다시 한 번 부끄러워집니다..)
우선순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신호로서 피로감을 이해하여 더 중요한 일에 주의의 초점을 두게 되면 피로감은 사라집니다.
물론 신체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든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때가 옵니다. 하루 일과의 끝무렵에는 수면이 제1의 우선순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용한 주의 자원의 용량이 한정돼 있고, 이 한정된 용량 안에서 현재 가장 내게 보상을 주는 목표에 주의력을 활용하도록 진화해 왔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이 연구의 요지입니다.
일상의 시사점
자아고갈 개념의 문제점은 이것이 훌륭한 자기합리화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더 이상 쓸 에너지가 없다'며 해야 하지만 하기는 싫은 일을 안 하도록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For one, if mental energy is more like an emotion than fuel in a tank, we can manage and use it as such and learn to ride out bad feelings. [^1]
만약 정신적 에너지(의지력)이 연료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깝다면, 우리는 좋지 않은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듯이 정신적 에너지를 관리하여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감정과 비슷하게, 현재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이 무엇일지 판단할 수 있게 돕는 신호로서 의지력이 바닥 난 느낌(혹은 피로감)을 이해하는 것이 유용해 보입니다.
결국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해야 하는지 혹은 다른 일을 해야 하는지 주의의 초점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처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죠.
의지력이 바닥 난 느낌이지만 해오던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즉 목표의 우선순위와 주의 초점을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주의를 빼앗아 갈 수 있는 외부 유혹, 즉 방해자극을 최대한 제거하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생각의 흐름이나 감정을 조절하거나(가령, 마음챙김 명상을 통한 감정 조절)
산책을 하며 잠시 쉬거나
미래의 보상을 생생하게 그려보며 동기 수준을 올리고
장기적으로는 목표 달성을 위한 행동이 지속적 주의 초점이 되도록 습관을 형성하는 등 내외적 주의조절 방법을 총동원하여 스스로에게 보다 유익한 행동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한정된 주의 자원을 목표하는 바에 맞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이나 습관을 설계하는 것[^2]이 당분 섭취를 통해 자아고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보다 과학적으로 느껴집니다.
즉, 자기조절은 고갈되는 의지력의 문제라기보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 가능한 주의조절의 문제 아닐까요.
이 글은 MarkedBrunch를 이용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