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프라다이버 되기
물을 좋아하는 건 태생이다. "장르는 운명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분지에서 태어났다. 바다는 멀고 눈에 보이는 건 온통 산이었다. 더위로 유명한 도시의 한여름은 촉감이 있었다. 어린 시절, 햇볕 아래 손을 뻗으면 뜨거운 공기가 손가락을 가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도 물과 가까워 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물이 좋았다.
사람들은 그런 내게 "수영 잘해?" 묻곤 했다. 반대였다. 수영은 어른이 된 뒤 배웠다. 나는 '물이 좋아서 물에서 앞으로 가려고' 수영을 배웠다.
수영 강습에서 내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서도 그냥 물 안에 있는 게 좋았다. 발끝에 물이 닿으면, 허리에 물이 찰랑이면, 얼굴을 물속에 묻으면 온몸으로 기쁨이 번졌다. 한꺼번에 나비들이 날아오르듯이, 나무의 잔가지마다 수십 개의 꽃이 피어나듯이.
수영은 자유형과 배영을 배우고 그만뒀다. 더 이상의 기술은 필요 없었다. 그 정도면 파도에 몸을 맡기고 원하는 방향으로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타국의 수영장에서 별을 보며 떠다닐 수 있었다.
말도 안 되게 넓은 동남아 수영장에서 거센 소나기라도 내리면 수영장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됐다. 물속으로 내리 꽂히는 빗방울을 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수면에 부딪히는 빗방울, 너울거리는 물결, 물속에서 듣는 먹먹한 폭우 소리, 등을 때리는 따끔한 빗줄기.
매일매일 수영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수치도 견딜 수 있겠다고 그 순간만큼은 생각했다.
회사에서 나는 '카페에서 자는 애'였다. 점심시간에 밥은 안 먹고 커피가 식어가는 테이블에 엎어져 잤다.
동료들이 나를 보았다고 했다. 인사하려는 동료도, 오죽하면 저러겠냐고 깨우지 말라는 동료도 있었다. 카페 구석 테이블은 내 자리가 되었고, 어쩌다 다른 사람이 앉아있으면 '오늘은 누가 먼저 왔네요'하며 사장님이 웃었다.
간혹 카페에 있는 잡지를 뒤적였는데 그때 어떤 에세이를 보았다. 프리다이빙을 하는 한 작가의 글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물속에서 신을 만났다."
그땐 프리다이빙이 뭔지도 몰랐다. 그냥 좋겠다, 나도 점심시간 끝나고 물속으로 풍덩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나는 크고 아름다운 수영장이 많은 태국으로 자주 떠났다. 여름휴가 시즌에도, 반복되는 퇴사 끝에도 물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곧 나는 더 깊은 물로 가고 싶어졌다. 물에서 앞으로 가기 위해 수영을 배웠다면, 깊은 물로 가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프리다이빙을 다시 만났다.
프리다이빙은 마지막에 들이 쉰 숨을 내뱉지 않은 채 깊은 물로 내려가는 여행이다. 호흡을 돕는 장비 없이, 핀(오리발)과 마스크(스노클링 물안경)만 착용한다. 가장 최소한의 장비로 가장 가까이 물에 다가간다. 프리다이버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입수 직전 마음을 가다듬고 들이마시는 '한 번의 숨'이다.
강습을 받고 가평의 K-26 잠수풀에서 시험을 봤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둡고 좁아지는 풀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어릴 때 옷장에 들어가 잠이 들듯이, 애인이 등 위에 늘어져 누우면 그 무게에 눌려 웃음이 터지듯이.
시험에 통과한 내게 강사가 "이제 인어가 되셨네요"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저는 물고기인데요."
자격증을 딴 뒤로도 코로나가 극성이었고, 일상이 바빠 다이빙을 가지 못했다. 나를 가르치던 강사가 그만두는 바람에, 딱히 만나본 적 없지만 함께 할 수 있는 크루도 사라졌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정신과에서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다.
나는 지옥이 있다는 건 안 믿지만 서울 지하철이 지옥인 건 믿는다. 지치고 예민해진 사람들이 가기 싫은 곳으로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 좁은 공간에 비집고 오른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아니면 그보다는 덜 자주, 지하철에서 어떤 종류의 패닉을 겪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나는 못본채했다. 그들은 도움을 바라기보다 주변을 경계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의 첫 공황도 지하철에서 시작됐다. 어느 날 출근길에 숨이 가빠졌고, 어느 날 퇴근길에 호흡 곤란이 지속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학창 시절 좋아하던 일본 만화에서 본 것처럼 봉투를 입에 가져다 댔다.
만화에서는 깔끔하고 빳빳한 종이봉투였지만, 내 건 배달의 민족 비닐봉지였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쉴 때마다 비닐봉지에 붙은 긴 영수증이 펄럭, 펄럭, 움직여 웃음이 났다.
공황에도 지름길이 있어, 가끔 침대에 누워서도 곧장 호흡 곤란이 오기도 한다. 나는 숨이 가빠 오면 물속을 떠올린다. 두렵고 자유로운, 고요하고 깊은, 내가 사랑하는 바닷속을.
한 번의 호흡을 간직한 채 물속을 유영하는 프리다이버. 물속의 나는 숨을 쉬고 싶다, 고 생각하는데 정확히는 산소가 부족한 게 아니라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싶은 것이다. 몸은 그러지 못해도 머리로는 그 두 가지 욕구가 다르다는 걸 구별해야 한다.
더는 못 참겠다 싶을 때에도 몸은 버틸 수 있다. 십 초만 더, 그다음엔 그 십 초에서 또 십 초만 더, 조금씩 기록과 간담을 늘려야 한다. 두려움과 자유로움 사이에서 스페이스바를 톡, 톡, 두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프리다이빙을 하면 명상을 권유받는다. 몸의 신호에 속지 않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리다이빙을 배우기 전부터 명상을 했다.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컴퓨터 OFF 하듯 카페에서 엎드려 자는 인간이니 명상 정도야 진작 시도해 봤다.
단지 내 프리다이빙 인생 최대 고비가 '중이염 이력'일 줄 알았지 '공황장애 판정'일 줄은 몰랐다. 패닉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오고, 페이스를 잃으면 나뿐 아니라 함께하는 버디도 위험해진다.
다시 다이빙할 수 있을까? 질문의 시간이 길어졌다. 가끔 해외여행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면 "나는 다이버야"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그 후 진짜 깊은 물에 들어간 적은 없다.
아이러니한 건 프리다이빙도 공황장애도 결국 호흡의 문제라는 것이다. 둘 다 '숨 쉬고 싶어!' 느끼지만, 프리다이빙은 이산화탄소를 뱉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는 것이고, 공황장애(과호흡)는 이산화탄소를 과도하게 뱉어내는 것이다.
나는 안다. 결국 다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아내기 위해선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 보는 방법 밖엔 없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탄 지하철에서 숨이 안 쉬어지는 건 나뿐이지만, 물속에서는 누구나 숨을 쉴 수 없다. 물속에서는 누구나 패닉을 염두에 둔다. 오히려 그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물을 두려워한다. 그 두 가지 마음은 함께다. 나는 두려움을 소중히 머금은 채 핀을 차며 물속을 수직으로 내려가는, 그리하여 내가 사랑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그것이 있는 곳으로 직접 가는 나를, 오랫동안 그려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여전히 다이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