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 나는 장원영일 수도 유병재

일 수도 있다

by rummbl


올초, 10월 중순에 출발하는 아일랜드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여자 대장부로 태어나 원대한 계획이 있을수록 입 다물어야 하는 상대가 있는데, 둘째가 엄마고 첫째가 상사입니다. 이방인이 될 결심을 품은 채 서른다섯 꿈과 장래희망, 자아를 찾아 헤맨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2025년 삼십 대 중반이 되어 깨달았어요!

-어른되면 삶이 안정된다: 거짓.. 매년 초고속 방황

-어른되면 낭만은 사라진다: 거짓.. 생활 습관에 맞춰 기구하게 자람


저는 초흔들리는 낭만휴먼으로 재정도 커리어도 박살 난 채 5년 간의 연애가 끝난 '이제 뭐 하지? 어리둥절 어른'이 되었습니다. 사랑에 거침없고 돈 같은 건 안 아까운 이십 대를 보낸 뒤에..(많은 생략) (생략) 그럴 거면 사랑과 돈 둘 중 하나는 쟁취했어야지..?


옴짝달싹 눈앞이 캄캄해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 서류 넣고 대한민국, 경상도, 장녀, 상경, 자취생 패는 다이 외치고 접었습니다. 진짜로 도망쳐야 해서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한 사람이 바로 저.


지구 반바퀴 돌면 방법이 생기겠지, 왜 죽으면 안 되는데 내가 슬로우모션으로 살 테니까 너네가 80년 동안 아껴서 봐.. 심정으로 서류 넣고 당첨되었어요.


아일랜드로 가는 이유는 내 나이를 워킹도 홀리도 하게 허락해 주는 단 3개 나라 중 하나였기 때문이고,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현빈이 진국으로 잘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무거나, 빨리빨리, 정착비만 벌면 떠난다는 생각으로 만만해 보이는 곳에 알바 이력서를 넣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원래 취준 할 때 자소서 한 개에 온 기력을 쏟고 붙으면 일하는 패턴으로 살아와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침대에 누워 6개월 허송세월 후 갑자기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면 사회 활동은 하되 돈을 받지 않으니 자유롭겠지라는 기대로요. 어린이 시설, 노인 시설 여기저기 돌았습니다.


비록 이력서는 빵꾸났지만, 사회적 언어로 이 시기를 둔갑시키지 못해도, 인생에 공백이란 없구나. 누군가 듣고자 한다면 내가 뭘 하고 있든 그 시기에 대한 서사는 있다,는 결론을 냅니다.


어린이도 노인도 돕고 싶지만 노인과 있으면 슬프고, 어린이와 있으면 슬프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어린이들의 선생님이 되었어요. 특정 브랜드 본사에서 후다닥 교육받고 어린이들과(38개월부터 7세) 사회생활한 지 이제 8개월이 되었군요.


첫 만남에 아이가 내게 준 쪽지


체험 수업을 마치고 나오며 아이가 준 쪽지를 들여다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제게 읽을 수 있는 편지를 줄 거예요. 하지만 그날의 기쁨은 이날의 기쁨과는 다르겠지요. 아이의 어머니에게 체험 수업 후기 메시지를 보내며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어머니, 믈룅이가 한글을 배우면 우리는 믈룅이의 세계를 더 많이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건 분명 아름다울 거예요."


며칠 전 수업 마치고 나오는데 내 학생(5살)의 동생(3살?)이 인사해서 나도 손을 흔들었어요. 남매의 할머니가 "폴리야, 어린이집 갈 때 울지 마~라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해서, 신발 신다 말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목가다듬고 "폴리야, 어린이집 갈 때 많이 울지 마, 선생님과 약속~" 새끼손가락 세운 채 멘트하고 2초 정지했다가 인사하고 나왔습니다.


축전 요청이 들어오다니 "이제 나는 유병재다!" 생각했습니다. 본인 이름이 들어간 구간 알아서 잘라 쓰라며 가람, 가영, 가은, 가을, 건우, 강윤, 강현부터~현아, 혜지, 희도, 희성, 희진까지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공통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만들어야겠군, 싶었거든요.


근데 친구가 이 얘기를 듣더니 "완전 장원영이네"라고 했습니다. 장원영은 수많은 축전 요청 때문에 도무지 대기실 복도를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래요.


저는 '여러분이어떻게하느냐에따라나는장원영일수도유병재일수도있다선생님'이 되었어요.


저는 교육자로서 저의 모습을 사랑하는데요. 좋은 자질도 있고 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믿어서 그렇습니다. 자만심인가 고민되어 간혹 과하게 겸손한 모습을 보여드리기도 하는데요.


ChatGPT 유료 결제를 통해 몇 가지 항목을 테스트하고, 치열한 토론 끝에 알게 되었어요. 이것은 자만심이 아니라 자기 신뢰라고 하네요. (AI는 유저에게 긍정적 경험을 주기 위한 대화를 구성하기에 이는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지만, AI가 비인간적으로 인간의 자료를 빨아들여 내놓은 적절하다고 판단한 답변이기에 이는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8개월은 어쩌면 제 삶에 다시 오지 않을, '즐거움이 거의 대부분인 일'을 하는 시기였습니다.


아이들은 빠르게 자랍니다. 지난 계절 옹알이하던 아이가 이제 현관을 들어서는 제게 말을 겁니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네가 자라는 만큼 나도 게으르지 않게 성장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도 계속해서 질문하고 고민하면 자만심이 아니게 된다고 하네요. 계속 고민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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