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나를 '자살무새'라고 부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오래됐다. 친구는 나를 '자살무새’라고 부른다. ‘자살’이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계속해댄다는 뜻이다. 친구는 내게 “왔니? 자살무새야?”말한다. 나는 이 말이 진짜 웃기다고 생각한다.
쾌청한 선진국 스위스의 안락사 비용도 알고, 지금 시키면 내일 아침 7시 전에 배달되는 로켓배송 번개탄 가격도 안다. 얼마 전 허용 국가에서 안락사한 사람의 시체 목에서 손가락 자국이 발견됐다는 것도 안다. 또 정신질환자는 안락사 허가가 힘들다는 것도 안다. 아.. 이미 정신과를 8년이나 다녀버렸는데.
나는 애인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며 여기가 내 집이구나, 싶을 정도로 온마음을 쏟는 사랑도 몇 번 했다. 골수이식을 받아야 하면 두말없이 내어줄 친구도 5명 있다. 사람들은 내 말에 자주 웃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는 재능이 내 안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무얼 하든, 웃을 때나 울 때나 사랑할 때나 내 속에서 죽음은 늘 지구처럼 자전한다. 나는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두루마리 휴지라고 생각한다. 둘둘 말아 길게 이어진 끝에 똑같이 생긴 마지막 칸.
누구도 탄생을 선택하지 않은 채 세상에 꺼내졌다. 모두 그렇다. 그래서 나는 죽음만큼은, 2025년이라면, 스스로 다룰 권리가 있지 않나? 질문한다.
유서를 남길 마음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했다. 실은 너무 많이 했다. 대신 묘비명을 짓는다. 어떤 걸 써야 ‘간지’ 날까? 아주 고민한다. 이십 대 중반엔 ‘아름답게 태어나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라 쓰려했다. 삼십 대 중반, 이제 그렇게 쓰기엔 뭔가 너무 많이 했다.
바뀐 내 묘비명은 ‘마지막엔 늘 농담을 하는 사람’. 어른이 된 뒤 내가 원했던 건 늘 그것뿐이었다. 경직되지 않을 것, 유연할 것, 정확히 절망하되 다듬어 말할 것.
타석에 들어서는 야구선수를 볼 때 가슴 뛰는 이들이 야구선수가 되길 꿈꾸듯. 어느 자리에서든 가장 유쾌하게 농담하는 사람을 볼 때 나는 가슴이 뛰었다.
삶이 스위치라면 진작 껐다. 탁. 끌 수 없으니 농담을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계속 묘비명을 바꿔가며 살아가는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너의 이름은?”이 아니라, “너의 묘비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