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하다 못해 바스락거리는, 하지만 보풀로 까슬 대는 이불을 가슴에 구겨 안고 잰걸음 소리를 복도에 채운다. 실은 급하지만 노련한 것처럼, 종종 아니 총총. 새 시트와 새 이불, 새 베개를 차르르 쏟아붓고 탁자 위에는 색채감 가득한, 어쩌면 촌스러운, 또 어쩌면 90년대에 만들었다 해도 믿을 법한 웰컴 카드를 세워 둔다. 120도로 각 잡고 열어 두면 눈에도 잘 띈다.
새 손님에게 잔털 하나 없이 깨끗한 베딩을 선사하는 것이 금희씨의 일이다. 처음 온 사람, 두 번째 온 사람, 세 번이나 온 사람..누가 오든 관계는 없다. 갈고, 갈아주고, 들고, 들어주고. 이번 주는 낮 근무, 다음 주는 밤 근무. 언제이든 관계는 없다. 그 무한한 반복 속에서 돈도, 소속감 따위도 나온다.
저어기 유니폼을 걸친 여자는 오늘 도착한 새로운 손님의 신상 명세 아니, 신체 명세를 흡수하고 있다. 으슥하게 불필요하듯 방치된 검은 기린 모가지 같은 물체는 높낮이 다른 나무의 풀을 잡아채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르락내리락 탁탁. 제 머리를 찧는데 손님들은 정작, 궁금한 표정으로 눈알을 쪼로록 굴리며 한결같이 뒤돌아 어떤 숫자를 확인한다. 어차피 이 흐느적한 공간에서는 빵강이냐 파랑이냐로만 인간을 구분하는데 몸의 무게가 뭣이 중헌디.
금희씨가 세워 놓은 웰컴 카드의 각이 흐트러진다. 신참 간호사는 벌써부터 너무 많은 반복 학습을 했는지 기계처럼 묻고 적고 묻고 적는다. 손님이 질문할 틈을 주지 않는 게 의도임이 뻔하다. 함께 온 손님 옆 다른 이가 반격할 시도를 하자 파란 팔찌를 채워 입을 막는다.
"저기요." 손톱 밑에 낀 때를 빼며 여유를 부리던 금희씨를 갑자기 불러 약간 놀랄 뻔했다. 그 옛날 반장 놀이처럼 손님에게 입을 옷을 건네고, 방 사용법을 알려준다. 이번 손님의 짐은 별로 없는 걸 보니, 파란 팔찌인 걸 보니 금새 방 뺄 사람이구나. 자주 치우는 건 귀찮지만 빨리 나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실은 더 크다.
빨간 팔찌를 찬 적빛 곱슬머리 손님이 인중부터 입술을 오물거리며 저 멀리서부터 데스크로 다가온다. 이게 맞느냐 틀리느냐. 저번에는 이랬는데 이번에는 어찌하고 싶다. 하필 밤새 나이트 선 예민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연차 높은 간호사를 골라 키보드 치듯 타다다 연거푸 문장을 쏟아낸다. 데자뷰다. 아니, 현실에서 매일 나타나는 장면이다. 소득 없이 돌아서야 할 것이 분명하므로 금희씨는 신경을 끄기로 한다. 둘 다 무슨 잘못이람. 한 명은 절실하여 그렇고, 다른 한 명은 정해진 과정을 행하는 것뿐인데. 잠 못 자 양쪽 입술이 벌겋고 허옇게 터진 의사 선생이 출동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자기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변명한다. 공부 많이 하셨군요. 그런데 그런 말투로 누구 하나 위로 되겠어요?
오전 8시, 오후 12시 30분, 오후 6시. 밥 주는 시간. 바퀴 달린 철제 수레에 수십 명의 식판이 덜덜거리며 실려 나온다. 이건 빨간 팔찌의 그이 것, 저건 파란 팔찌의 저이 것, 이 특식은 또 누구 것. 오전 8시 아침 식사는 하루 시작을 알리는 억지 알람이다. 꾸역꾸역 호로록. 그래도 쓰윽 비워낸다. 오후 12시 30분, 오후 6시. 이때는 밥차가 데구루루 굴러와도 온통 정적이다. 빨간 팔찌, 파란 팔찌 손님들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손님들의 미간에는 온통 찌푸림 뿐. 고통의 깊이 만큼 패어 있어 눈물이 거꾸로 흐르면 담길 지경이다. 이 시간 만큼은 누구 하나 허투루 웃는 이 없고 누구 하나 연속극을 소리 내어 틀지 않는다. 배려가 머무는 시간이다.
저녁 8시 30분. 막장 드라마 속 시어머니가 며느리 뺨 때리는 것으로 고요가 깨진다. 파란 팔찌, 빨간 팔찌 손님들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된다. 두 사람이 지나려면 똑같이 차려입은 옷깃이 스쳐야 하는 복도를 소리 없이 걷는 사람, 저녁을 이윽고 먹을 수 있게 된 사람, 어제부터 멀쩡해진 사람까지. 오늘 새로 온 손님이 어제 온 손님과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같은 색의 팔찌를 찬 사람에게 어떤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하고 오라고 용기를 건네고 또 어떤 이는 영웅담처럼 겁을 주고 또 어떤 이는 안 해도 될 검은 말을 해가며 사색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시간들로 밤이 만들어지고 하루를 이겨내고 방 뺄 날을 맞이한다.
빨간 팔찌의 곱슬머리 손님이 첫날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생경하다. 채혈할 때보다 붉은 기가 돋는 립스틱을 주룩 바르고 이마를 뚫을 듯 날카로운 눈썹 산 두 개를 그려 곤란하기도, 심란하기도, 멋지기도 하다. 금희씨와 유니폼 입은 여자들이 모여있는 데스크로 와서는 "선생님들, 감사했습니다." 하며 90도로 꾸벅 인사를 한다. 의외인 것은 데스크에 걸터앉은 사람들의 미지근한 반응.
빨간 팔찌를 뺀 곱슬머리 손님은 며칠 사이 친해진 다른 방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자기 동네에 들르면 꼭 날 찾으라며 알 수 없는 말을 공간에 뱉어두고 사라졌다. 거긴 어딜까. 서로 묻지 않는다. 그저 이곳에서 또 안 보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퇴원이 미뤄진 두건 쓴 할매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고 핏망울이 또옥똑 떨어지지 못해 고여있는 배액관은 처연하다.
금희씨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 팔찌를 찬 이들에게는 너무나 대수로운, 그런 날이 넘어간다. 또 누구는 숨이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