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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하는 엄마 Jan 20. 2021

돌쟁이 아기 엄마는 어떻게 통번역대학원 생활을 했을까?

통대 입학 후 생활


오늘은 어제에 이어 통대 시리즈 제2탄, 돌쟁이 아이를 두고 그 혹독하다는! 통대 생활을 어떻게 꾸려갔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행복하지만 힘들었던 그때의 기억은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시간의 제약으로 좀처럼 감당해내기 어려웠던 순간들, 시댁과 친정에 아이를 맡기면서 겪어야 했던 남모를 마음고생까지.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돌쟁이 아이를 두고 복학, 해 말아?


저는 2011년 11월 입시에서 합격해 2012학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3월에 출산이 예정돼 있었죠. 입덧도 심하지 않았고 몸도 임신 체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건강했기에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입시를 준비하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출산 후였죠. 핏덩이를 두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가족과 상의 끝에 입학을 1년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 같은 아이와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학교 갈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아직 젖도 안 뗐는데 그냥 1년 더 미룰까?' 고민도 많이 했죠. 하지만 그때 친정엄마의 조언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공부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1년 지나면 그때 또 학교로 돌아가지 못할 이런저런 핑계가 생길 거라고 말이죠.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복학, 아니 입학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공부를 한다는 건...


2012년 3월, 그렇게 저는 드디어 통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저는 학교생활에 너무나 잘 적응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과 결혼, 출산을 겪으며 배움에 대한 갈증을 겪어서인지 모든 수업이, 모든 배움이 달고 맛있었습니다. 가끔씩 아이 생각이 나긴 했지만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이 저를 가득 채웠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맡기며 제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의 크기도 결코 작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는 시댁에서 이틀, 친정에서 이틀을 봐주셨습니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며느리 도우시며 아이를 봐주신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습니다만, 양육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의견 차이로 때로는 생각지 못한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런 심리적 부담에 더해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는 것도 큰 장벽이었습니다. 수업이 보통 하루에 2개, 많은 날은 3개였습니다. 아침 8-9시경에 학교로 출발해 일찍 끝나면 3-4시, 늦으면 6시가 다 되어 돌아오곤 했습니다. 집으로 오면 곧장 이유식을 먹이고 아이와 충분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밥 먹이고 놀아주고 씻기면 이미 7-8시, 9시를 훌쩍 넘기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잠들면 저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과제를 해야 했기 때문이죠. 기본적으로 통대 수업은 거의 매시간 과제가 주어집니다. 수업 자체가 번역에 대한 크리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제를 제출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죠. 그런데 아이는 한밤중에도 수시로 깨서 저를 찾았습니다. 깊이 잠들어도 제가 옆에 없으면 어떻게 아는지 이내 울어대곤 했습니다.


한 번은 영한 문학수업의 기말고사가 과제로 대체된 적이 있었습니다. 난이도는 최상, 선배들도 혀를 내둘렀을 만큼 어려운 수준이었죠. 그런데 하필 그때 제가 지독한 몸살을 앓았습니다. 과제 마감은 당장 내일 아침인데 몸은 곧 쓰러지기 직전에 애는 잘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새도록 울면서 과제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공부를 하는 건 정말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 2년의 시간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던 건, 역시 가족의 힘이었습니다. 마침 그때가 남편 회사도 무척 바쁠 때라 양쪽 어머님들의 도움이 정말 컸습니다. 시어머니는 생활이나 육아 전반을 많이 도와주셨고, 친정 부모님은 왕복 2시간 거리를 오가시며 힘들다 말씀 한 번 없이 손녀를 돌봐주셨습니다. 여기에 '아기 엄마'라고 특별히 챙겨주셨던 교수님들, 여러모로 배려해 준 동기들도 아주 큰 버팀목이 돼주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상황에 계신가요? 일단 시작하세요!


어제 제가 통대 입시와 관련해 글을 올린 후 몇몇 분께서 이런저런 궁금증을 물어오셨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통대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 혹은 그럴 예정이신 분들이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아기 엄마의 신분이지만 통대 입시를 생각하고 계시거나 이미 합격했지만 저처럼 입학을 미룬 분이 계시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시작하세요! 라고요.


아이 엄마기 때문에 못할 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훨씬 더 힘든 건 사실입니다. 결혼 안 한 미스와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유부녀의 상황이 같을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난관에 가로막힌다 해도 직접 부딪쳐 겪다 보면 하나씩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제가 입학할 당시 아이는 한창 젖을 먹고 있었기에 젖을 안 물리고 2-3시간만 지나도 가슴이 단단해지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죠. 처음 두세 달은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달려가 젖을 짜내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젖 양도 줄고 아이도 찾는 횟수가 줄어 자연히 젖을 뗄 수 있었습니다.


입학 전, 제가 이런저런 걱정에 밀려 복학을 1년 더 미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혹은 통대 입시를 시작하기 전, 나이가 너무 많다며 이제 결혼하는 데 무슨 공부냐며 입시 준비 자체를 포기했다면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도 가끔 남편과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지레 짐작에, 괜한 걱정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번역가로서 지금의 성과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 그때 공부할걸.'하고 미련과 후회 속에 살고 있겠죠.


시작을 망설이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시작하세요!


덧) 제가 공부하며 그렇게 힘들게 키운 제 딸아이는 이제 "엄마가 번역한 책이 최고야!"라며 자기도 엄마처럼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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