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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Choenghee May 03. 2024

원하는 걸 원 없이 할 수 있다니

덕업일치의 삶 그 자체

 중등 영어 임용 고시에 합격한 후, 저의 삶은 덕업일치 그 자체였습니다. 중학생 때 영어 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그 순간부터 이런 것들을 하며 살고 싶다는 것들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아무 마음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으니까요.




영어 원서, 기사 읽기


 임용 고시 합격 전에는 영어로 된 원서를 읽거나 기사를 읽어도 뭔가 마음이 불안하더라고요. 시험공부에 매진할 시간인데 아무리 영어 텍스트로 되어있다 하더라도 책, 기사 따위에 시간을 쏟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임용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영어교육학, 영어학, 영미문학 등의 원서를 읽으면 모를까 소설, 에세이 등의 문학 작품에 시간을 쓰는 건 하지 말아야 할 일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교사가 된 후 이 모든 것들이 수업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가르칠 대상이 중학생이었던 터라 모든 문장들이 학생들의 수준이나 문화적 소양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간혹 좋은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수업 중간에 그러한 문장들을 제시하고 학생들과 분석해 보거나 그 작품의 스토리를 소개하고 책을 추천하는 등 학생들에게 교과서 이외의 살아 숨 쉬는 영어, 실생활에서의 영어를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영어 교사로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좀 더 영어 학습에 대한 동기와 흥미를 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학생들이 영어 학습의 실제적 필요성을 절감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효과는 아침 독서 시간이었습니다. 교실 앞에 서서 영어로 된 원서를 집중하며 읽는 선생님을 본 학생들은 호기심에 빠졌습니다. 저 책은 도대체 무엇일까. 호기심을 넘어 약간은 동경의 대상이 된 듯했습니다. 질문하는 아이들이 많았으니까요. 선생님은 이거 다 읽을 수 있어요? 얼마 만에 다 읽어요? 와 저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등등. 역시 교사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 사소해 보이지만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니 더욱 책임감을 가집니다.




미드, 영드 보기


 임용 준비할 때 빠졌었던 <빅뱅 이론>에 이어 OTT를 통해 무수히 많은 미드와 영드를 보았습니다. 물론 교육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 미드, 영드에서 수업으로 적용한 부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어 교사가 되었으니 미국, 영국 티비쇼를 본 시간들이 그저 재미를 위한 소모적인 시간(killing time)은 아니었습니다. 영어 교사로서 저 자신의 영어 듣기, 말하기 능력 신장에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어요. 결국 여가시간에 즐긴 취미 생활은 자기 계발로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미드, 영드를 수업에 활용하진 못했지만 애니메이션은 내용적으로도, 영어 수준으로도 중학생들에게 활용하기에 손색이 없었으므로 적극 적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토이 스토리, We Bare Bears 같은 것들이요. 문법 수업에도, 자유학기 주제선택 프로그램에도 활용했답니다.


 이렇게 제가 즐기는 모든 것들이 수업에도 활용되니 꿈꿔왔던 영어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팝송 듣기


 영어 교사로 합격하기 전에는 팝송 듣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습니다. 공부하는 중에 듣는 음악의 효과에 대해 못 들어본 건 아니었지만, 팝송은 결코 도움이 되리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몸을 들썩이게 하는 리듬, 감성에 빠지게 하는 가사 등 눈앞에 놓인 책 속 지식에 빠져야 할 저를 건져내는 듯했으니까요.


 합격 후에는 팝송마저 수업 자료가 되었습니다. Charlie Puth, Lauv 등을 필두로 당시 인기 있는 가수들의 감성 깊은 노래들을 하나씩 들려줄 때면 아이들도 그 흐름에 고요히 침잠하는 듯했습니다. 감성 짙은 애정 표현을 담은 진한 가사를 한 두 개 짚어 의미를 파악해 볼 때면 사춘기의 학생들의 눈도 동그래졌습니다. 오늘의 목표 문법이나 어휘와 관련된 퀴즈를 가사와 연관 지어 낼 때면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들어 답을 내는 데 도전했답니다.


 팝송을 통해 학생들이 영어 듣기 능력이 신장되길 바라진 않았습니다. 그저 영어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관심이 생겨 즐기기만 해도 영어 습득의 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타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그 문화권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습득하고자 하는 동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까요.




재미있는 수업을 위해 무한정 연구하기


 막상 교사가 되어보니 시간이 많지 않더군요. 수업뿐만 아니라 행정업무도 많은데 담임 학급 반 아이들, 수업 담임 학급 반 아이들과 상담, 소통하며 추억을 쌓으려면 학교에 출근 후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다 활용하고 퇴근 후의 시간 또한 써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제 머릿속은 온통 학교 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담임반 학생에게 학교 폭력이나 교우 관계 등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님과 퇴근 시간 이후 전화 상담이 이어지는 경우는 허다했고, 학생 일을 제 일처럼 걱정하고 해결 방안을 강구했던 것 같습니다. 수업 연구도 퇴근 시간 후에나 가능했습니다. 책상 앞에 굳이 앉아있지 않더라도 다음 차시는 어떤 자료를 활용하면 아이들에게 더 흥미롭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실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수업을 연구해야지 등등 퇴근길을 걸으며 적절한 수업 자료들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주말에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읽고 싶던 영어 원서나 영상을 보며 수업에 써먹을 수 있는 게 나오면 바로 캡처를 하고 관련 부분을 다운로드했습니다.


 쉴 틈 없이 바쁘게 흘러가던 하루들이었지만 머릿속에 언제나 한 차시 수업을 재미있고 알차게 이끌어나가기 위한 공상은 숨 틀 구멍이었고 즐거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실제 수업은 말 그대로 (숨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학생들 관련 문제들과 행정 업무들 사이에서요.




업무를 진심으로 즐기기


 영어 교사이다 보니 맡은 업무도 이와 관련된 업무를 많이 담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국제교류, 국제문화이해 등이요. 이런 업무를 맡게 되면 1년 동안 우리 본교와 교류를 맺고 있는 해외 자매 학교와 지속적인 연락을 하면서 방문 일정 및 계획을 기획하고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는 프로그램 및 활동을 진행하게 됩니다. 또는 본교 내에서 학생들이 영어권 문화를 접하고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예산을 사용해 기획 및 집행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또 본교에 배치된 원어민 보조교사 관리 업무도 덤으로 하게 될 수도 있고요.


 그저 말 그대로 행정적인 문서 업무가 아니라 학생들의 교육 활동과 관련이 되어 있고, 영어를 활용하고 즐기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업무다 보니 더 보람을 느끼며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초근을 하면서까지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적도 있었고, 미국 방문을 앞두었을 땐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학생들과 함께 미국 친구들에게 나눠줄 편지나 선물도 준비하고 깜짝 선보일 K팝 댄스도 연습했습니다.  

 

 지금도 미국 자매학교 선생님과 몇몇 학부모님들과 카톡으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우리 학교에 배치되셨던 원어민 보조교사 분들과도 본교를 떠난 후에도 만남을 이어가기도 했고요.


 물론, 국제교류나 문화 이해와 관련되지 않은 업무를 맡았을 때도 있었고, 그 업무들이 고리타분하고 하기 싫었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형식적인 업무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은 학생들을 교육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니까요. 어차피 해야 할 일. 조금이라도 학생들과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책임감을 갖고 하나씩 일을 해나갈 때의 성취감도 좋았고요.   








 영어를 좋아하는 영어덕후로써 영어 교사가 된 이후의 삶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일적인 시간 외에도 여가 시간에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영상을 보고 기사 등 텍스트를 읽으며 보내는 시간들이 단순 유희를 위한 것들이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저의 영어 실력 유지 및 발전, 수업 자료에도 활용되니까요. 그러니까 그저 노는 시간이 노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 개인의 성장과 직업적 전문성 신장, 둘 다에 영향을 주는 아름다움을 항상 느끼며 감사하는 나날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저를 학생들도 알아보나 봅니다. 선생님 덕분에 싫었던 영어가 좋아졌다는 학생들의 말이 전해져 올 때 많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항상 생각합니다. 영어를 좋아하는 마음,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해온 노력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며 힘들지만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 시간들을 학생들이 저를 통해 느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영어에 마음을 닫은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그 문을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영어는 학생들에게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으니까요. 이를 통해 학생들도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잘하기 위해 노력하며 원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글 제목 이미지 설명: 교사가 된 해 약 1년여의 교직 생활 중 맞이한 겨울 방학에 같이 교사가 된 친구와 영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직접 찍은 빅벤 사진이지요. 해리포터 덕분에 어릴 적부터 영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제가 드디어 영국 런던에 입성해 여행을 했습니다.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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