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금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는가

by 이민경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종종 교대가라, 사대가라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청개구리 근성을 가진데다가 학교라는 공간과 교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교사는 절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내가 느끼는 그 시절 학교는 수용소였다. 약간의 웃음과 소소한 재미가 조금 존재하는.. 그런 답답한 공간 속에 구성원으로 있는 것은 고3까지란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극구 거부하던 교육자의 길에 스스로 걸어들어온 것은 삼십대 중반이 되고서였다.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나는 여러 아르바이트를 도장깨기 하듯 경험하다 학원강사라는 효율좋은 아르바이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파트 국어강사였지만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고민도 들어주고 하다보니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나는 강사였지만 아이들이 학습적으로나 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 기뻤다. 게다가 내가 어려운 것도 쉽게 설명하고 단순화시켜 아이들을 이해시키는 강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아르바이트는 졸업 후 직업으로 이어져 전일제 입시학원 강사로 경력을 쌓게 되었다. 대형 학원에서 팀제로 운영되는 시스템이었기에 우리 학년과 담임반 학급운영을 잘 하는 것이 실력으로 드러나는 것도 즐거웠다. 그냥 성적만 올리는 학원이 아니라 아이들이 학원오기를 즐거워했으면 해서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내어 담임활동을 했다. 학원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매월말 학부모 상담을 할 때만 빼면 말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부모님과의 상담은 고통스러워졌다. 충분히 스스로 공부하여 성적을 낼 수 있는 학생도 학원의 필요성을 부각시켜야 했다. 다음달 등록을 시키기 위하여 프로강사의 스킬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게 정말 힘이 들었다. 가짜로 살고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종종 인터넷에서 대안학교 교사 모집 공고를 뒤적거렸던 것이.. 하지만 20대 후반에 홀로 연고도 없는 시골의 기숙학교로 교사생활을 하러 갈만한 모험심이나 용기는 내게 없었고 어찌저찌 결혼까지 하게 되어 조금씩 싹트던 푸른꿈은 잊혀져버렸다.


결혼, 출산, 육아로 5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뱃속에서 꿈틀거리던 아가가 세상에 나와 아장아장 걷고 말을 하고 웃고 뛰는 사랑스런 모습을 전심을 다해 지켜보고 보살폈다. 아이가 사랑을 먹고 커가는 동안 내 안의 싱그러운 푸르름은 말라비틀어져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잊혀졌던 나의 푸른꿈이..

그래서 서른넷의 적지 않은 나이에 17년을 살았던 서울생활을 접고 금산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마음을 먹고 가족을 설득했다. 마침 뜻이 맞는 사람들이 금산에 대안학교를 만들겠다는 소식이 들렸고 직감적으로 나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는 걸 예상했다. 1년간 대안학교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불을 보듯 뻔히 보이는 고생길이라며 금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반대했다. 가족을 설득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지만 강렬한 이끌림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건 내 힘이 아니었던 것 같다. 빈땅에 건물하나 없는 학교의 시작이었다. 낯선 시골동네에서 주말부부생활을 하며 아이와 어렵사리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시골집이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곳인지, 학교라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준비와 인생을 갈아넣어야 세워갈 수 있는 것인지, 청소년기 아이들과 기숙학교생활을 한다는 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대안학교 교사로 산다는 것은 내 모든 것을 드러내고 부끄러움을 감내하며 상처 속에 성장해 가는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나의 교육예술가로서의 첫 걸음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금요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