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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Aug 27. 2023

명은아, 너는 네가 됐겠지.

영화 <비밀의 언덕>


침실이라고 부르는 하나뿐인 방을 휴대폰 출입금지 구역으로 정한 지 한 달쯤 되었다. 작년에 반년 정도 잘 지켰었는데, 한 순간에 무너져 집중 맞은 도둑력 모드로 살아오다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대충 사나흘에 한 번은 실패한다. 아니지. 긍정적으로 써보자. 60~70% 정도의 성공률을 기록 중이다,라고. 실패해서 폰을 침대 옆에 두든, 성공적으로 거실 충전기에 연결해 버려두고 오든, 방해금지모드는 필수다. 암막 커튼으로 빛을 차단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에서 자야 한다. 이 부분은 매슈 워커의 엄청나게 두꺼운 책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를 참고해 주길 바란다. 아무튼 인간에게 잠은 중요하고, 나에게는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누구도 나를 깨울 수 없다. 아이폰 즐겨찾기 연락처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오직 그 사람들이 전화할 때만 벨소리가 울린다. 가족과 친구들 몇 명-끝. 인생의 대부분을 새벽 취침 점심 기상으로 살아온 나의 생활 패턴을 아는 이상, 이들 중 나에게 오전에 전화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 한 명만 빼고.


오늘 아빠가 전화한 시간은 11시 20분이었던가. 그러니까 나는 눈도 안 뜨고 또 두 개의 미션에 실패한 셈이었다. 하나는 폰을 거실에 두고 자기. 또 하나는 아빠를 즐겨찾기 목록에서 빼기. 그리고 아빠는 딸이 오전에는 대체로 자고 있다는 걸 또 까먹은 것이다. 실은 애초에 기억하지 않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그러니까 아빠가 굳이 전화를 한 목적은 이것이었다.


“너 면허증 살아있냐?”


그럼 면허증을 죽였겠어요? 아무튼 아빠는 운전하는 차의 보험금 문제 때문에 전화를 한 것이었고 나는 코로나 재감염 격리가 풀린 후 걷기 운동이라도 좀 하고 계시냐고 물었고 대충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니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이 대화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한 것 같은데? 그리고 나의 답은 아빠 차의 보험을 나로 바꾸면 그 차는 내 재산으로 잡히게 되는데, 프리랜서에게 재산이 늘어난다는 것은 세금과 건강보험료가 오른다는 것으로… 맞네, 역시 이미 했던 대화였다. 하지만 그 어떤 아무것도 아닌 대화로 잠을 깨운다고 해도 아빠가 응급실에 갔다는 전화보다는 나은 법이지. 그러니 나는 괜찮다. 그런 생각을 흘려보내며 노란 소파에 멍하니 누워있는데 며칠 전 영화 볼 때 메모를 남겨뒀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대사와 생각이 뒤섞인 메모의 한 중간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우리 아빤 놀기만 좋아하고 게을러요.”


<비밀의 언덕>을 보고 누가 이런 문장을 옮겨 적냐는 말이다. 누구긴요, 내가요. 그리고 대사가 아닌 내 생각은 이런 식으로 적혀있다.


‘노란’을 ‘노오란’으로 썼을 때.


명은이가 처음으로 상을 탄 환경보호 글짓기 대회에 제출한 시에 ‘노오란’ 연기였던가, 뭐 그런 단어의 조합이 나왔을 때 적었을 것이다. 노란을 ‘노오란’으로 써도 괜찮다는 걸 알고 그렇게 썼을 때, 어린이는 작가가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밀의 언덕>은 1996년에 5학년이었고 그해에 처음으로 반장이 되고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탔던 명은이의 이야기다. 빠른 생이 아니라면 아마도 1985년 생이었을 명은이는 토요일까지 학교를 가고 토요일 4교시에는 H.R이 있었던 시절에 산다. 그해에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지금은 전국에서 한 명만 쓰는 게 허락된 빨간 뿔테 안경을 쓰고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교복을 입지 않은 초등학생과는 딴 세계에 사는 척하면서 어린이들과는 10년쯤, 어른들과는 1년쯤 시차를 둔 척했다. 마치 첫 생리가 시작된 뒤 더 이상 체육시간이 즐겁지 않고, TV에 나오는 사람들을 따라서 베레모를 썼던 그 5학년이었던 적은 없는 것처럼.


다시 명은이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5학년인 명은이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과 언덕 아래의 꼭대기를 부지런히 오가며 비밀을 만들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불사하고,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선택을 한다. 주목과 칭찬, 관심을 받고 싶은 욕망이 첫 상장이라는 형태로 두 손에 주어졌을 때, 명은이는 믿기로 했을 것이다. 나는 ‘노란’ 대신 ‘노오란’이라고 쓸 수 있으므로, 엄마처럼 막살지 않으므로, 중지 손가락 첫 마디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쓰고 또 쓸 수 있으므로, 글쓰기는 나의 재능이라고. 하지만 재능이 거기에만 있던가. 특히 에세이라는 형식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의 글쓰기라면.

젓갈 장사를 하는 엄마와 반백수인 아빠가 만든 가훈도 없는 가족을 숨기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낸 명은의 거짓말이 중요한 문제인 세계에 혜진이 등장하면서, 가족과 성장과 어린이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였던 <비밀의 언덕>은 글쓰기, 그 중에서도 에세이 쓰기에 관한 영화가 된다. 혜진이 손을 들고 “아빠는 없고요 엄마는 아가씨골목에서 일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부터다. 혜진은 손을 들고 나에게도 묻는다.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가 가정주부이길 바라서 가짜 앨범까지 만든 명은이도 글을 쓰고, 엄마가 아가씨 골목에서 일하고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나도 글을 씁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은, 에세이는 무엇일까요?


거짓말이 들통날 위기에 놓인 것으로 모자라, 본 적도 없는 재능을 가지고 나타난 동급생 때문에 십일 년의 삶에 가장 큰 위기를 맞닥뜨린 우리의 명은이. 여기서의 재능이란 솔직함인데, 그건 명은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글쓰기다. 환경 보호 글짓기를 위해 책을 대여섯 권 쌓아놓고 보고, 통일 관련 주제의 글을 쓰기 위해 통일 전망대를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명은이에게 “자기 얘기를 솔직히 쓰면 돼”라는 혜진의 말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 것인가. 자기 얘기? 나의 이야기?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명은이 통일전망대까지 다녀와서 쓴 평화 통일에의 염원과 깨달음에 관한 글은 우수상을 받고, 글을 쓰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혜진 자매가 쓴 글은 최우수상을 받는다. “우리 자매에게 평화는 점심시간이다.” 전쟁을 학교 생활에, 평화를 점심시간에 비유한 글의 첫문장을 듣고(읽고), 명은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나는 안다. 노란을 ‘노오란’으로 쓰는 걸로, 서론 본론 결론에 따라 쓰는 걸로, 적당한 인용구를 넣는 걸로 안 되는 거였어? 안 된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쓰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명은이는 첫 문장만으로 알았을 것이다. 저게 바로 이야기이고, 좋은 글이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느꼈을 질투는, 결핍을 가짜로 채워 넣을 때의 감정과는 또 다른 새로운 감각이었을 테다. 이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배워 알게 된 명은이는, 이제 어떻게 쓰게-살게 될 것인가.



스포일러가 되므로 세세하게 적지 않을 <비밀의 언덕>의 결말이 나는 좋다. 명은이가 솔직하게 ‘나의 이야기’를 쓴 뒤 벌어지는 일과, 이 일을 각자의 방식으로 수습해 보고 또 반응하는 어른들을 그린 후반부를 보며 많이 울었다. 울다가 이렇게 적었다. “명은아, 너는 네가 되겠지.”


명은이 잘 보이고 싶어 하는 5학년 담임선생님의 이름은 김애란이다. 2000년대 국문학과 졸업생으로서 여기서 소설가 김애란을 즉각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게 떠올리고 보면 역시 단편소설 ‘서른’의 이 문장에 닿게 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하지만 <비밀의 언덕>을 보면 알게 된다. 명은이는 명은이가 될 것이다. 명은의 가족 관계, 부모의 직업, 글짓기 대회라는 경험, 명은이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에 그 시절의 나 자신을 겹쳐보고, 유년 시절의 가난이 만든 흉터의 모양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나 같은 사람이 몇십, 몇백 명이라 해도, 명은이는 내가 아니다. 명은이는 명은이고, 자라 명은이가 될 것이다. 겨우 내가 아닌, 기어코 네가. 명은아. 이게 ‘나의 이야기’야. <비밀의 언덕>이 바로 ‘나의 이야기’야.


명은아.


우리 아빠가 너의 아빠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우리 가족은 수원에 간 적이 있어. 중학생이었던 오빠는 빼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만 갔어. 오빠는 가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갈 수도 없었을 거야. 그때 우리 차는 트럭이었거든. 트럭은 가까스로 3인승이니까. 너와 동갑이었던 내가 경기도 수자원공사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타서 시상식에 간 거였지. 얼마 전까지 나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어. 우연히 조카가 내 옛 책장에서 당시 기념으로 발간됐던 문집을 찾아냈고, 거기 내 이름이 있는 걸 보고 물어보면서 겨우 기억이 떠올랐던 거야. 그런데 난 여전히 트럭을 타고 갔다는 것과 글의 소재 말고 다른 기억은 떠오르지 않아. 제목은 ‘물의 여행’이었고 물 한 방울이 바다까지 가는 그런 여정에 관한 글이었는데, 근 30여 년이 흘러 찾아온 오염수 방류 시대에 새삼스럽게 어울리는 소재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내 기억은 그게 전부였는데 엄마의 기억은 다르더라고. 엄마는 가는 길에 들렀던 휴게소를, 함께 먹었던 점심인지 저녁인지의 메뉴를, 내가 상을 타던 순간을 다 기억하고 있었어.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너의 글도, 기억도 그럴 거라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야. 네가 ‘할머니에게 쓴 편지’를 묻어두고 입선작으로 공개한 ‘Happy Birthday to 가족’을 엄마가 신문에서 오려 스크랩북에 붙였던 순간부터, 그 글은 너보다는 엄마의 기억에 오래 남게 될 거야. 네가 어떤 기억과 감정을 완전히 잊었을 때도 가족은 그걸 오래 기억하고, 또 반대로 너는 절대 잊지 못하는 부끄러움과 수치와 받은 상처를 가족은 없었던 일처럼 잊기도 할 거야. 어쩌겠니. 우리가 다른 사람인 걸. 가족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마음과 가족이 싫고 견디기 힘든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넌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네 상장에는 반으로 접는 벨벳 상장 케이스가 없어도, 종이 상장을 든 어린이들은 중앙에 있지 말고 옆으로 빠지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래서 무대 중앙의 조명이 얼굴을 비껴가더라도, 있는 힘껏 발꿈치를 들어 명은아. 너는 기어코 네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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