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복국 Jun 23. 2023

아들도 가끔 운다(기형도 '엄마생각')

시의 해석 -2

엄마생각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아들의 아버지가 되기 전에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아무래도 홀로 남겨 있는 시적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홀로 남겨져

의지할 데 없이

외롭게

적막 속에

엎드려서 눈물 흘리는 아이

덩그러니

어릴 적

내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었지만

나를 배에 품은 채로 학교에 들락거리던 것을

고깝게 여기던 뭇사람들의 시선에 괴로워하시면서

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우고 가정주부의 삶을 택했다.

당시는 여성의 사회 활동에 극악무도하게 인색한 시대였다.


그래도 아버지 홀로 벌이로는 아무래도

가정 형편이 궁색한 편이라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일거리를 알아보셨더랬다.

당시는 화장품 혹은 보험 상품 판매원같이

방문 판매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어머니께도

그런 직종에 일할 기회가 왔었다.

현장에 나가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의

교육을 이수해야 했는데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

세상의 대부분에 무지하고

참신한 돌발 행동을 멈추지 않았던

내가 마음에 걸리셨더랬다.


외할머니에게 간혹 나를 맡기기도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데리고 교육에 가시곤 했다.

하지만 아이를 교실에 입장시킬 수 없어서

교실 밖 복도에 나를 두고 어머니 혼자 수업에 들어가시고

수시로 나와서 나의 안위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으셨다.


나는 그저 교육이 끝나고

어머니가 사주셨던,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던

밀크셰이크의 맛을 기억할 뿐이다.

그 달콤함이 좋아서 나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그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가끔 마주하는 어머니의 반가운 얼굴도

차라리 위안이고 기쁨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때,

어머니는 초등교사 시절 익혔던 피아노 실력에 힘입어서

자그마한 피아노 교습소를 시작하셨다.

여기저기 빚을 내서 피아노를 구입하고

한편 교습소로 꾸몄다.

그 동네에서는 나름 독점업체라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다. 나는 집에 함께 있긴 했지만

어머니의 보살핌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어느 날 학교를 끝나갈 즈음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졌다.

교문에는 자녀의 우산을 챙겨 온 부모들로 북적거렸다.

친구들도 하나 둘 부모님의 우산 속으로 사라졌고

나 혼자 남겨져 비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하지만 비는 속절없이 쏟아졌고

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젖은 거라 서두를 필요도 없었고

난 초등학생에게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집까지의 여정을 폭우 속에서 즐겼다.

나중에는 노래까지 불렀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쁘셨다.

난 비를 쫄딱 맞아도 방긋방긋 웃는 나 스스로가 대견하여

어머니의 칭찬을 기대하며 다녀왔다고 크게 외쳤다.

어머니는 나에게 우산을 쥐어주며

너는 어차피 젖었고 중학생 형이 마칠 시간 되었으니

이 우산을 가져다주라고 하셨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어머니의 하찮은 심부름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어린 나에게도 마음 어느 귀퉁이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린 날이었나 보다.


기형도의 시에서

찬밥 같이라는 비유가 주는 울림은

어린 나를 떠올리며 서글퍼하기에 참으로 적절했다.

어린 시절의 윗목이 주는 서글픈 서늘함을

실감할 수 있었기에

아련함 감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어 이 시를 읽으니

배춧잎 같은 발소리로 무겁게 돌아오던

어머니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금 간 벽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들의 흐느끼는

울음을 행여나 듣게 되었다면

어머니는 그 발걸음마저 멈추고 그 자리에

무너지지 않았을까?

들어가기 어색하다

화장품 판매원 교육을 받던 내 어머니가

쉬는 시간에 잠시 나와 나를 살필 때

눈가가 젖어 있지 않았겠는가?


비에 흠뻑 젖어 홀로 방긋방긋 웃던

아들을 확인하고서야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할 틈도 없이 투정 하나 없는

둘째 아들이 믿음직하여

형의 우산을 쥐어주던 바쁜 어머니의

손이 떨리지 않았다고 하여

그 시절의 힘겨움을

이제 와서 내가 원망한들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그저 서글픈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기형도의 '엄마생각'은

시를 이해할 만큼의

시절을 지내고 나서는

청년이든 아저씨가 되든

이러나저러나

그저 울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이전글 노력의 끝에 꿈은 이루어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