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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국 May 10. 2022

완다와 닥터스트레인지의 행복 찾기

(닥터스트레인지 2: 대혼돈의 멀티버스 스포 있는 리뷰)  

**스포가 무지막지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닥터스트레인지 2(이후 닥스로 줄임)'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닥스2는

닥스뿐만 아니라 완다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워' 에서처럼 메인 빌런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 축이 되며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서사가 닥스2에서도 존재한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완다의 행복 찾기'가 닥스2의 서사가 되겠다.

완다의 입장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나 좀 행복하면 안 되겠니'라는 절규가 담겨 있는

서사인 것이다.


이렇게 완다를 기준으로 이야기의 구조를 나눠보면

완다와 완다를 방해하는 사람들로 인물들을

구분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 영화가 단순한 대립구조의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완다를 기준으로 등장인물들을 구분해버리면 단순히 선악 대립 구도의 흔해 빠진 영화로

입체적 재미가 담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다.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행복이다.

행복을 기준으로 하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분류화가 가능하며 이야기의 전개 또한 명확해진다.

또한 완다의 행복 찾기라는 시작에서 보편적 행복에 대한 철학적 단상으로 이야기가 확대될 수 있다.


우선 이 영화는 행복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행복의 형상화는 팔머의 결혼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혼식이야 행복의 시작일 수도 있고

멸망의 단초일 수도 있지 않냐고 반문하는 기혼자들이 있겠지만, 영화에서는 이 결혼식이

행복이 전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팔머와

그의 남편을 통해 보여준다.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단어에 민감하지 않다.

행복하다고 소리치지도 않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절규하지도 않는다. 담담하고 여유 있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딱히 불안해하지 않고 감정의 변화의 폭이 좁다.

(원래 결핍이 흥분을 초래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팔머는 지난날의 소극적인 감정 표현을 아쉬워하는 스트레인지의 고백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으며

달라질 건 없다고 말한다. 팔머의 남편 또한 아내의 옛 연인인 스트레인지의 출연에 동요하지 않으며 괴물을 물리치는 스트레인지에게 환호를 보낸다.

오히려 팔머는 스트레인지에게 행복하냐고 되묻는다.

스트레인지는 동요를 감추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거짓말이거나 혹은 확신이 없는 말투다.

스트레인지의 이러한 입장은 괴물이 등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인의 행복의 공간에서 과한 동작으로

탈출하는 스트레인지의 액션에서 알 수 있다.

(마음의 혼란은 대체로 불필요한 몸짓으로 나타난다.)

결국 팔머의 행복하냐는 질문은 이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질문임과 동시에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나온다.

노골적으로 행복을 찾고 추구하는 사람은 당연히 완다다.

완다는 지난 '완다와 비전' 시리즈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아들들이 다른 멀티버스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이젠 진정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멀티버스, 속된 말로 전 우주를 뒤지는 것을 넘어서서 남의 우주들까지 다 뒤지고 다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완다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흑마법을 사용하고, 살인까지 주저 않고 저지른다. 꽤 많이 저지른다. 행복이라는 명확한 목적은 수단을 잠식해 버린다.  

완다의 변화는 '완다와 비전'을 감상한 사람들에게는

나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영화 본편에서도 올슨의 명 연기를 통해 이러한 감정이 잘 표현되는 장면들이 있다. 완다가 아들들과 즐겁게 지내는 꿈에서 홀로 깨어나 절망에 빠지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허망함은 이후 완다 행동들을 받아들이는 근거가 된다. 완다는 끝 모를 상실감이라는 고통을 잊기 위해 오히려 행복 찾기에 열중한다. 더욱이 이 행복은 본인이 이미 느껴봤던 안온함이다. 아는 맛이 무섭다는 게 이런 경우 아니겠는가?!

[출처: 네이버 영화]

완다의 행복 찾기 대척점에 서있는 세력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무언가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들이다. 즉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자신들의 행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들은 아메리칸 차베즈와 웡의 수제자, 그리고 또 다른 우주의 완다이다.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아메리칸 차베즈는 자신의 능력, 웡의 수제자는 웡의 목숨, 또 다른 우주의 완다는 아들들의 안전이다. 아메리칸 차베즈는 물론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 다니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능력을 완다로부터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그 능력을 빼앗기게 되면 어쩌면 다른 우주에 살아 있을 자신의 어머니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에 대한 직접적 연결고리 혹은 희망을 제거당하는 것이다. 웡의 수제자도 웡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웡이 리더로서 가지는 상징성도 있지만 웡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더욱 중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웡을 지켜내고 아마도 만족했을 것이다. 또 다른 우주의 완다는 스칼렛 윗치 완다에게 지배당하면서도 오로지 아들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스칼렛 윗치 완다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켜냄으로써 아들들의 안위까지도 보장받는다. 실제 이들은 완다와 최전선에서 대립하며 영화의 전반부와 중반부 마지막 부분에서 물리적으로도 직접적으로 부딪치며 완다와 처절하게 대립한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켜낸다. 그들은 행복을 뺏기지 않았으며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켰다. 그들의 방법론과 내세우는 명분은 무엇 하나 나무랄 게 없다.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런데 닥스와 허울만 장대한 일루미나티 멤버들은 행복을 지키려는 자들에서 왜 빠지는 걸까?

일단 얘네들은 완다와 싸우기는 하지만 완다의 대척점에 서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완다와 똑같은 방법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옳은 것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인 것이다.

이 영화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면서 영화의 초반부터 행복을 찾는 방법론에 대해서도 사유를 강요하고 있다. 이 영화가 행복을 찾는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화두는 공리주의의 모순과 관련된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기초를 둔 아이디어로서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면 소수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 찾기의 방법에 대한 질문도 영화 초반에 나타난다.

블립 기간 동안 자신의 가족을 잃어버린 닥스의 옛 동료는 닥스에게 질문한다.

'그 방법밖에 없었나?'

닥스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팔머의 행복에 대한 질문의 대답처럼 여전히 자신은 없다.

옛 동료의 질문을 풀이하면

 '너의 대의가 소수의 희생을 전제한다면, 과연 그 대의는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영화는 이 명제에 대하여 러닝타임 내내

명확한 대답을 제시한다.

정말 틀렸다. 그건 아니다. 글러먹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히틀러가 그러했고 마오쩌둥이 그러했고 수많은 독재자가 그러하고 현재까지도 푸틴이 또한 자신만의 대의를 위해 재앙을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대의를 위해 아메리칸 차베즈의 목숨을 희생시키려 했던 꽁지머리 닥스는 목숨을 잃었고 다른 우주에서 영웅 대접을 받던 닥스도 자신의 대의를 독단적으로 밀어붙여 다른 우주의 멸망까지 초래한다. 멸망을 초래한 본인도 동료들로부터 죽음을 강요당하지만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완다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죽였지만 결국 다른 우주의 자신의 아들들과 그 우주의 본인에게 너의 대의는 틀렸다는 확인 도장을 받게 된다.

일루미나티의 멤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그들 우주의 닥스의 독선을 비난했지만 결국 그들의 동료를 희생시켜서 자신들의 대의를 관철하려고 했고 심지어 아메리칸 차베즈와 다른 우주에서 온 닥스까지도 자신들의 우주를 지킨다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행복을 찾는 방법론에서 닥터스트레인지, 일루미나티, 완다는 명확하게 동일한 집단으로 묶을 수 있다.

즉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독선을 가지고 있는 집단인 것이다.

(찰스 자비에 옹은 살짝 빼주어도 될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의 결말에 도달하는 해법이 나타난다.

재앙을 막는 방법은 독단과 독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차베즈를 희생시키지 않은 닥스의 결정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닥스 또한 대의를 위하여 아이언맨과 블랙위도우, 비전을 비롯한 수많은 삶의 희생을 묵과했던 인물이다. 이 인물이 자신을 부정하자 희망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푸틴도 영화를 보고 무언가 느낀다면...)

완다가 또 다른 우주의 완다를 희생하고 자신의 행복을 관철하는 것이 결국 본인의 아들들의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자 이야기는 결말을 향하여 잰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즉 양적인 측면에서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하여 자신의 행복이나 옳음을 추구하는 것이 대하여

이 영화는 비교적 분명하고 명확하게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결론은 어디로 귀결되는 것일까?

결국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대의명분을 갖추고 정당한 방법을 통해서 성실하게 노력하며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는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일까?


앞서 이야기했지만 결국 완다와 닥터스트레인지는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비교적 일관되게 행복을 추구했던 완다에 비하여 그 방법론은 비슷하지만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닥터스트레인지가 있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닥스와 완다를 통해 행복찾기의 결론을 영화는 다시금 제시한다.

완다는 결국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다. 그리고 스칼렛윗치에서 분별력 있는 완다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우주로 돌아와 신전을 무너뜨리고

그 속에 파묻혀 버린다.  

닥스는 자신의 독선을 포기하고 차베즈를 희생시키지 않는 결단을 하고 다른 우주의 팔머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고 현재의 상황을 인정하며 고장 난 시계를 고쳐 새로운 일상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그 이후 닥스는 평온을 되찾고 삶을 살아갈 힘과 여유를 되찾게 된다.

그러자 흑마법의 저주가 발동하면서 제3의 눈을 뜨게 된다.


결국 완다와 닥스의 행복찾기는 실패한 것이다.

애초에 그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다의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멸망해 가는 우주의 닥스가 증명했듯이

팔머와 맺어지는 닥스의 행복한 우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행복만 좇아서 분별을 잃고 헤멜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주어진 일상을 단지 살아가는

것 자체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다에게 또 다른 우주의 완다가 '늘 사랑하며 키우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선언이다.

여기는 너의 영역이 아니고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다. 너의 행복에 물을 주고 가꾸는 것은

내가 향유할 수 있는 영역이란다. 너에게 허락되지 않았으니
그냥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길 바란다. 그런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의 영역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겠지만

견디지 못하고 헛된 행동을 하게 된다면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걸 분리주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다 날리고 간단하게 말하면 분수에 맞게 살아라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겠다.

다만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영화에서조차 꿈꾸기 힘든 일이 되었다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닥스가 제3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은 후속 편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이야기하는 행복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아직 이 녀석은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정도로 해석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여담이지만 완다도 그렇고 최근의 스파이더맨에서 닥터스트레인지까지...

슈퍼히어로들이 행복해지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지나 보다...가여워라.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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