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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국 Jan 10. 2023

게이샤의 추억

커피이야기

커피를 즐긴다.

커피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다.

그래도 로스터리 카페를 전전하다 보면

가끔 야망과 자부심의 에너지를

주로 친절함으로 뿜어내는 주인장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약간의 호기심에도 섬세하게 반응하여

커피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바쁠 때 빼고)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 중에

게이샤 원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게이샤 원두는 1kg 가격이 10만 원이 넘어서 함부로 판매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참고로 게이샤라는 이름은 일본과 전혀 상관이 없다. 파나마의 지명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 소비재가 비싼 이유는 뻔하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희소한 것.

물론 게이샤 원두도 그러한 이유로 비싼 가격이 책정되는 것이긴 하다.

재배 환경이 제한되어 있고 키우기도 힘들며 로스팅도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상품이다.

하지만 게이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나와 동갑인 카페 주인은 (동갑에 딸이 둘이었다. 그들은 커피 이야기만 들려주는 게 아니다.)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게이샤 커피는 '신의 커피'라고 불린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커피를 가리는 파나마 지역의 대회에서 한 심사위원이 남긴 감상평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커피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커피와 신이라니 비유가 성립하기에는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다.


그 이후로 게이샤 커피를 경험하고 싶었다.

원두 가격이 워낙 비싸서 인근 로스터리 카페에서는 게이샤 원두를 사용하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니 더 안달이 났다. 좀 먼 곳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싱글 오리진 원두를 사용하는 카페는 찾기 힘들었고

블렌딩 된 커피를 맛보고 오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커피에서 신의 얼굴이나 정수리 같은 어떤 강렬함을 느끼긴 힘들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저 그런 커피도 카페인은 가지고 있다.

커피가 맛있어 봤자 한우 맛이 나고 그러진 않을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그저 의식하지 못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러니까 오늘

난 게이샤 커피를 맛보았다.


동네를 산책하는데 우연히 어마어마하게 빈티지한 카페에

동네 아주머니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주머니들이 모이는 곳은 커피든 뭐든 맛집이 분명하다.

들어가 보았다

그 가게는 스페셜티 커피를 판매하는 카페였다.

스페셜티 카페는 그 커피의 산지를 농장 단위까지 특정 짓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관리와 유통 로스팅까지의 과정에서 말 그대로 스페셜한 관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커피를 판매하는 곳을 말한다.

스페셜 티의 원래 정의는 스페셜티 커피 협의 선정 기준

80점 이상의 커피를 말하는 것이지만, 몇몇 공신력 있는 스페셜티 커피 협회에서 개최한 대회의 입상 경력이 있는 커피들을 포함하여 주로 고급 커피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카페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적혀 있다. 게이샤...이랏사이마세

카페에 들어서자 작은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맨 위에 영어로 되어 있어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게이샤라고 적혀 있는 것이었다. 오호 이 무슨 운명의 데스티니인가?!!

내가 게이샤네요라고 외마디 비명처럼 외치니깐

아니다 다를까 열정과 자부심으로 점철되어 있는 젊은 카페 주인은 싱글 오리진이며 게이샤 중에서도 최고로 알려진 파나마 에스메랄다 원두라는 말을 빠르게 덧붙였다.

친절하고 젊은 카페 주인을 한 번 쳐다보고 난 커피 가격에 다시 놀랐다.


2만 5천 원... 한 잔에....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무슨 커피 한 잔이 전복삼계탕보다 비쌀 수가 있나?

하지만 빈티지인지 80년대인지 판단하기 힘든 카페의 분위기와 아주머니들의 수다로 인한 동시다발적인 소음과 주인장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그 어떤 몽환적인 분위기로 나를 몰아세워 현실과의 괴리감을 키운 것인지

나는 너무나 명랑하게 그거 주세요라고 외쳤다.

그래 그렇게 기다렸던 커피잖아.

그 정도 가치가 있다며 날 다독이는데

부담스러운 눈망울의 젊은 카페 주인은 '내추럴'로 할 것인지 '워시드'로 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쉽게 말해 가공방식의 차이로 내추럴은 건식, 워시드는 습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하면서

게이샤 내추럴은 망고 오렌지 등의 달콤함과 균형 잡힌 맛을 선사하며

워시드는 재스민, 꽃향기와 같은 맛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난 그냥 꽃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며 내추럴을 선택했다.

있어 보이는 라인업

그리고 게이샤 커피가

서빙되었다.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설렘인지, 돈이 아까워서인지 약간 손을 떨며 자그마한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와....

이거 그냥 커핀데...

아침에 예가체프 원두를 드립 해서 마신 커피 맛이랑 차이를 잘 모르겠는데

쿠팡에서 무료 배송에 1kg 당 2만 원을 주고 구입한 원두로 내린 커피랑

크게 차이를 알 수 없는 2만 5천 원짜리 한 잔의 맛이라니...

둘 다 원산지가 에티오피아긴 하지만...


당황스러워 얼음에 타서 차게도 먹어보고

입에서 한참 굴려서 마셔보기도 했지만.... 글쎄다.


주인장은 게이샤는 1회에 한해 리필이 된다면서 이번에는 워시드를 마셔보겠냐고 권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워시드 원두로 한 번 더 마셔보았다.

워시드는 확실히 내 취향에 가까웠다. 옅은 바디감에 비해 진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연하게 탄 커피를 좋아한단 뜻이다.)

그렇지만 가성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이 커피를 다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호기심이 해결되었다는 뿌듯함은 있다.


어디선가 게이샤 원두는 대농장에서만 재배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소규모 농장에서는 원두 생산 자체를 시도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파나마 원주민들이 운영하는 농장에서는 해외까지 수출할 수 있는 원두 생산량이나 유통망을 확보하기 힘들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농장을 사들여서 지금처럼 유명하게 만든 이도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은행장이었다.

게이샤 원두를 생산하는 대규모 농장들은 협회를 만들어 가격을 관리하고 있다.

게이샤가 원두가 가지고 있는 나름 풍부한 맛에 희소성, 마케팅, 가격의 관리(그러니까 담합...)가 보태져

게이샤 원두에 판타지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불만은 없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커피의 소비와 향유에 있어서 이러한 가치를 가진 원두의

존재는 분명 긍정적인 작용도 충분히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게이샤의 맛보다 그 경험에 가치를 두는 것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아무튼 난 게이샤를 마셔보았고

이제 안 마셔도 된다.

그리고... 리필까지 해서 마셨더니

영원히 잠들 수 없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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