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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국 Mar 07. 2023

앵무새 보러 갈래요?

아들의 첫 연애

아들은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아들은 뚜렷한 상심을 보이면서도 단호하게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표정을 지었다.

막상 꺼낸 의욕에 찬 대화주제가 사그라지는 게 아쉬웠지만

캐물을 수 없는 노릇이다. 나를 존중해 달라는 청소년의 외침은 이런 경우 설득력 있게 유효하다.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다.

아들의 첫 연애는 작년 여름 무렵 시작했다.

여자 아이가 아들에게 건넨

 "우리 집에 앵무새 보러 가지 않을래?"

한 마디에 시작된 연애였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라면 먹고 가지 않을래?'의 참신하면서도 혁신적인 버전이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한동안 아들은 행복해 보였다. 아들의 허연 얼굴에 만연한

미소는 첫 연애의 설렘보다는 나도 여자 친구가 있다는 뿌듯함 같은 느낌으로 해석되었다.난 아들의 연애 초반에 둘은 만나면 뭐 하고 노냐라는 질문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명확한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질문이 수줍은 아들의 강렬한 저항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딱히 만나서 뚜렷하게 무언가를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둘이 만나기나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같은 교실에서 오고 가며 인사하고 장난치는 행위들을 연애라고 부르는 듯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갔고 아들은 여자친구가 있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저런 것도 연애라고 할 수 있는지 어휘의 범주화 문제에 대하여 철학적인 도전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겨울로 계절이 바뀌고 아들의 생일이 되었다. 생일날 아들은 같은 반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가 담긴 엽서 꾸러미를 들고 왔다. 아마 수업 시간에 그런 활동을 했나 보다. 아들의 여자친구가 뭐라고 적어놨는지 궁금했다. 슬쩍 여자친구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들춰보았다.

'초콜릿케이크 많이 먹어, 니가 좋아한다며... 캬캬캬캬'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작문 실력이니 그러려니 해도,

이건 도무지 여자친구의 생일 축하 멘트라고 보기 힘들었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주지도 않고 많이 먹으라는 건 초등학생의 재정상태에서 최선의 배려라고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캬캬캬캬'라는 의성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연인이 아니라 친한 동성 친구 생일축하 엽서에도 합당하지 않은 비웃음 혹은 과격함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 무례한 표현이지 않은가?!


난 확신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연애가 아니든가... 혹은 한때는 연애 비슷한 것이었을지언정, 현재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아니다 다를까 아내는 우리 아들이 여자친구랑 얼마 전에 헤어졌다고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아들은 사실 그렇게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들은 연애를 한 것이 아니다. '본디 내 것이 아닌데 빼앗긴들 어떠 하리?!'


나는 나의 첫 이별을 떠올렸다.

툭하면 싸우고 헤어지고 화해하고

집착하고 미련을 가지고 애정인지 애증인지 불확실한 어떤 상태에서 참으로 길게도 싸우고 울고 붙잡고 당기며 지속된 연애였다. 하지만 헤어짐에는 단 한순간만이 필요했다.

만남에 대한 미련이 있을지언정, 그 헤어짐의 주체가 누구든

둘 사이는 끝난 것임을 꼭 그 순간이 없었더라도 나와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연애의 끝 부분에서는 진흙탕 속에서 서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대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건 그만큼 그 시절의 그녀와 내가 서로에게 집착하고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유물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연애가 바람직한 연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이 얽혀 있고 점철되어 있는 연애라는 행위는

가볍고 상큼할 수만은 없는 게 아닐까?

연애의 시작과 끝은 중의적으로 우울의 끝을 담고 있다

아들의 연애와 이별을 보며 잠깐 상념에 빠졌던 것이다.

첫 이별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다. 난 그분이 어딘가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를, 그리고 다시는 나와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우리 아들의 다음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무언가를 느끼는 기회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기왕에 시작하는 남녀의 사랑이라면, 연애 비슷한 것이라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무언가를 배우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최근에 둘째 아이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었다.

둘째 아이는 이제 7살이다.

내 둘째 아이와 그의 여자친구는 또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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