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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하룻 Feb 27. 2024

어리석은 모범생에게 보내는 충고

높고 긴 애벌레 기둥은 누가 쌓았는가 (꽃들에게 희망을)

퇴사 후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다시 찾아 읽게 되었다. 샛노란 표지에 줄거리는 나비가 되기 위한 애벌레의 여정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줄무늬 애벌레의 행동이 꼭 내 삶을 풍자한 우화였다. 나비는 어리석은 모범생이었던(아마 지금도) 내게 '네가 오르고 있는 기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알에서 깨어난 줄무늬 애벌레_"세상아, 안녕."하고 그가 말했다.  "햇빛이 밝은 세상은 무척 찬란하구나."


줄무늬 애벌레는 세상에 태어나 삶의 의미를 찾아 모험을 시작한다. 그러다 무수한 애벌레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 발견하고 따라 이동하다 애벌레들이 겹겹이 쌓여 하늘까지 닿아있는 거대한 기둥에 도착한다. 애벌레들은 아무도 이유를 모른 채 무작정 남들을 따라 서로 밀치고 밟으며 꼭대기에 올라서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줄무늬 애벌레는 '큰 꿈'을 찾기 위해 올라가려 애쓰지만 쉽지 않았고 불안과 의구심을 느끼던 중 노란색 애벌레를 만나 경쟁과 혼란을 피해 기둥을 내려온다.


하지만 둘만의 평온과 행복도 잠시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도전을 하기 위해 노란색 애벌레를 떠난다. 충분히 쉬면서 몸집도 커지고 힘도 세진 애벌레는 거침없이 꼭대기로 향한다. 다른 애벌레와 눈이 마주쳐 감상적인 생각이나 심란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그 사이 노란색 애벌레는 방황하다 무엇인가에 꽁꽁 묶인 모양새의 늙은 애벌레를 만난다. 늙은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의 삶을 버리고 나비가 되는 모험을 해야 한다고 알려 준다. 노란색 애벌레는 고치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을 거란 불확신 때문에 고민하지만 용기를 내 자신의 실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줄무늬 애벌레가 꼭대기에 닿을 때쯤 들려온 실망스럽고 잔인한 진실, 맨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노력한 게 아까워서 쉬쉬하고 있다는 것. 그때 아름다운 노란 나비가 기둥을 향해, 줄무늬 애벌레를 향해 날아온다. 줄무늬 애벌레는 노란색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을 알아보고 '꼭대기까지는 기어가는 게 아니라 날아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을 내려오며 다른 애벌레들에게 진실을 알리려 애쓰지만 대부분 들으려 하지 않고 어떤 이는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없다고 애벌레의 삶이나 즐기라고 빈정댄다.


마침내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에서 내려와 나비가 된 노란색 애벌레를 따라 고치를 만들고, 나비가 되어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이야기는 끝난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애벌레 기둥을 오르는 줄무늬 애벌레였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고 공부를 잘하면 칭찬을 하니까 공부를 했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다들 일을 열심히 잘해야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서 일을 아주 열심히 했다. 빈틈을 보이면 공격을 당하고 약자가 되는 세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기보다는 잘 경쟁하기 위해서 몸집을 불리고(능력을 기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라(약점을 보이지 말라)고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된 동료 중 하나는 내게 '고기를 많이 먹으면 공격성이 는다고 하더라'며 고기를 구워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맞설 기운(?)을 얻곤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나는 줄무늬 애벌레처럼 몸집을 불리지 못해 사회에서 주로 약자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누굴 크게 밀치거나 짓밟지도 못했을 거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자로서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또는 상사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했던 내 비겁한 모습은 아직도 상흔으로 남아 종종 나를 괴롭게 비튼다. 


문득 내 일상과 직업에 대한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상사들 나아가 업계 선배들 중에서라도 롤모델을 찾으려 했지만, 이 직업과 자신 삶에 대한 확신과 올곧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지켜볼수록 그들 역시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정신 차리기 힘들어 보였다. 남에게 내밀기 좋은 명함과 깨끗한 차림새, 화려한 명품과 자산 목록으로 자기를 위안하며 나도 그것을 동경하길 바랐다. 아마도 그들 역시 맨꼭대기의 애벌레들처럼 언제 밀려 떨어질지 몰라 무섭고, 마주한 현실은 허무하지만,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이 책에서 찾아보자면 고치가 되기 전 망설이는 노란색 애벌레다. 기존의 삶에 대한 미련과 스스로 개척해야 할 미래에 불확실성 속에서 고민한다. 다시 업계로 돌아간다면 경력을 통해 세상에서의 나의 효용 가치를 즉각적으로 가장 높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아직 젊은 내가 그럴듯한 직장으로 돌아가길 은근히 바라시는 눈치다. 나 없이도 바쁘게 돌아가는 옛 회사와 직장 동료들을 보면 나만 낙오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직장에서의 빛났던 순간들이 그립기도 하고 매달 때맞춰 들어오는 짭짤한 월급은 사무치게 그립다. 


다만 나는 길고 많은 고민을 통해서 아주 작은 부분만 확실히 결정했다. 이제는 타인이 향하는 방향을 무작정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 노란색 애벌레처럼 나비가 되고 싶다는 꿈을 찾았다던가, 꼭대기에 가기 위해 날아야 한다는 걸 깨달아서가 아니다. 다만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저 위를 향해서 타인과 맹목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언젠가는 정말 누군가를 밀어 떨어뜨리거나 밀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하는 것도 싫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꼭대기가 영광스럽지만은 않을 것임도 이미 알 것 같다.


늙은 애벌레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무언가에 다시 설레고, 탐색하고, 방황하며 내 몸에서 어떤 줄을 뽑아내어 고치를 만들 수 있을지 기다려주고 싶다. 운이 좋다면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아직은 충전이 덜 된 것 같지만 내게도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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