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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Mar 22. 2021

생일선물로 학습지를 받았다.

남편은 귀엽다고 웃었다.

얼마 전 유퀴즈에서 성귀순 번역가님이 나왔다.

멋진 수염에 촌스럽지 않은 청바지와 워커가 눈에 띄었다. 불어를 전공하신 분 답게 포스가 넘쳤다. 그는 그의 뤼팽을 향한 마음을 뜨겁고 열렬하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조용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서 그 진심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그는 진짜다. 그는 진짜야.


멋졌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는 모습에 내 가슴이 다 설렜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누군가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부러웠다. 그리고 자신을 뤼팽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새삼 내 마음 속을 두드렸다. 너를 대표할 수 있는 건 뭐니?


나는 스페인어통번역을 전공했다. 앞선 글에 숱하게 말했지만 투고에 계절학기까지 어떻게 졸업이 가능했나 싶을 정도로 나는 스페인어를 못한다. 게다가 이제 졸업한지 10년을 향해간다. 알던 인사마저도 다 까먹기에 이르렀다. 살면서 단 한번도 내가 스페인어를 못하는 것에 대해, 혹은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었다. 정말 단 한번도.


근데 이번 유퀴즈를 보면서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저렇게 누군가를 대변할 수 있는 열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조금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요즘 자꾸 무언가 나를 대표할 수 있는 걸 찾고 있는데 결국 전공을 떠올리게 된건가.


그런 뜬금없는 감정과 더불어 내 마음을 울린 한 마디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번역가라는 직업은 더 없이 행복한 직업이 될 것입니다"였다. 그냥 단순히 그 한 마디가 스페인어를 떠올리게 했다. 다시 공부해볼까. 하는 마음도 이것 떄문이었다.


물론 내가 지금 스페인어를 다시 공부한다고 해서 번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박사는 돼야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거니까. 사실 스페인어로 번역하고 싶은 책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학시절 스페인 문학도 그렇고 중남미 문학도 그렇고, 공부하느라 개고생만 했지 흥미는 전혀 없었다.


반면 나는 무라카미하루키의 빠순이를 넘어 초초초초초초초초초초초 특급 빠순이다. 안 읽어본 책이 없고, 좋아하는 책은 10회독도 넘게 한 것 같다. 과거 첫사랑으로 인한 이별의 슬픔도 하루키로 극복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스페인어보다 공부하다 만 일본어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루키 책을 원서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 일본어를 먼저 하는 건 순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먼저 공부해야겠다. 고 결심했나보다.



유튜브를 보는데 어떤 학습지가 눈에 띄었다. 1년동안 숙제를 다 하면 환급을 해준다는 학습지였다.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환급을 받을 수 있다는 문장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 또 어떻게 내가 스페인어 공부가 하고 싶은 건 알고 이렇게 광고가 뜬거지.


어제가 생일이었다. 남편이 뭘 갖고싶냐는 말에 42만원짜리 학습지이야기를 대뜸 꺼내들었다. 남편은 '읭?'하는 표정으로 바로 입금해줬다. 진심이냐고 물었다. 진심이지. 내년엔 시험도 볼거야. 그래야 일본어를 배울 수 있으니까!


42만원을 전부 환급받게 되면, 바로 일본어를 신청해야겠다.

그러면 내 꿈인 하루키 원서 읽기가 가능해질까?


작심삼일 찌질이가 2년 프로젝트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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