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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호수 Jan 17. 2023

1. 그가 이겼다.

정신과 의사 남편과 ADHD 아내

그가 이겼다.


조금 전 투명한 약케이스에서 나는 약을 한 알 꺼내먹었다. 요일별로 착착 꺼내먹게 세팅해놓은 약케이스다. 세상에서 제일 약 먹기 싫어하는 내가 내 손으로 약을 꺼내 먹었다. 아니지. 비타민 D까지 포함하면 두 개다. 의사가 비타민 D가 부족하다고 꼭 2000mg짜리를 먹으라고 했지만, 일단은 1000mg으로 챙겨먹는 중이다. 왠지 2000이라는 숫자는 부담스러워서 반만 먹기로 한다. 그렇게 두 개의 약을 입에 털어넣고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받아 꿀꺽. 한입에 털어넣었다. 약 먹는걸 싫어하는 건 어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알약 먹는 걸 성공한 게 거의 고등학생이 되어서였을까. 지금도 큰 알약은 도저히 못 먹는다. 그나마 다행인건, 비타민d 알약도, 그리고 이 약도 사이즈가 작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먹을 만 하다. 그러나 문제는 '먹는다는 행위'자체가 아니다. 이것을 먹는다는 행위는 내가 나의 병증을 인정했다는 뜻이며, 오랜 반항과 혹은 게으름으로 인한 미뤄옴에 스스로 백기를 들었다는 뜻이다. 마음으로의 백기. 정신적인 백기. 가장 힘든 '행동으로 옮김'의 백기.  


이미 15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가 나의 병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15년이 되었다는 것은, 결혼을 하고 떨어져 산 1~2년 이후 함께 살기 시작하자마자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동안 그는 나의 병을 의심했고, 관찰했고, 확신했고, 권유했고, 부탁했고, 이를 다시 반복했다. 그 오랜 시간동안 어느새 나 역시 스스로의 병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도 나의 수많은 증상을 인식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정신과의사인 남편이 이렇게 맞다는데 뭐 굳이 아니라고 할 건 또 뭔가. 맞으면 맞는 거지. 주변 사람들에게도 대놓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를 만나고 다시 제대로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가? 나에게 병이 있어. 라고 말하는 것과 그 병이 지금 내게 통증을 준다거나, 내 수명을 갉아먹고 있다거나, 내 눈에 보이는 피부병을 일으킨다거나 하는게 아닌데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서 진단을 받고 약 처방을 받고 또 약국에 가서 그걸 타오고 하는 과정을 다 '해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도 심지어 미국에서??? 지금 이대로도 꽤 잘 살고 있는데(내 생각엔). 그 어려운 과정을 또 굳이 해야 하는 이유는 뭔지? 이 많은 의문에도 다 불구하고 이겨내고 병원에 가야 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ADHD.

Attention-deficit/hyperactivity disorder

과잉 행동 및 주의력 결핍 증후군.


오늘날에는 마치 감기처럼 흔하게 회자되고 인식되는 병.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는 병이다. 아이들이 집에서 뛰어만 다녀도 '쟤 혹시 ADHD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로 누구나 아는 병이고, 누구나 함부로 진단하려 드는 병이기도 하다. '내 아이가 ADHD가 아닐까?'라는 의심은 아이를, 특히 남자아이를 둔 부모라면 한두번쯤 안해본 적 없으리라. 때로는 '나도 ADHD가 아닐까? '라는 의심 또한 많이들 할 것이다. 성인 ADHD라는 용어도 요즘은 흔하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의심하지만 그 모두의 대부분이 다 의심에서 끝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모두가 한번쯤 내 아이의, 나자신의 ADHD를 의심해 보지만 그렇게 흔하게 의심한다는 것은 한편으론 이것은 매우 '정상에 가깝다'는 의미의 또 다른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아이 ADHD아닐까?

- 설마.

- 병원에 가볼까?

- 병원에 가서 약 먹으라고 하면 어떡할 건데? 먹일 거야?

- 아니. 그건 아니지.


또는.


- 나 아무래도 ADHD같아.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성인 ADHD에 내가 너무 많이 해당되는 거 있지

- 그럼 병원에 가서 진단 받아봐

- 받아서 뭐 어쩌겠어. 지금 이나이에 약을 먹을 것도 아니고. 생긴대로 사는 거지.


이런 대화도 아주 일상적이다. 나도 언니와, 친구들과, 수많은 지인들과 이런 대화를 한다.

또는 남편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에서


- 선생님. 저희 아이가 이런이런 행동들을 하는데 아무래도 ADHD 같아요.

-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긴 곤란한데요. 의심이 되신다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시는 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대화 역시 일상이다. 그러나 그 중의 99.9프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 아이들은 실제 병원에 데려가야 할 정도로 의심스럽진 않다. 설령 ADHD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 지금처럼도 꽤 잘 살아갈 만 하다.


이런 대화를 여기에 굳이 꺼내보는 건, 내가 그들을, ADHD의심을 수도없이 하고 심지어 확신까지 하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은 절대 먹지 않으려는 그들을 내가 너무~~~~~~~~~~~~~~~도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과연 정신과 의사인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오늘 이 한 알의 약을 먹었을까? 대답은 1000퍼센트 No이다. 절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나의 ADHD를 확신하고 일평생을 살면서 병원에는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아. 갑자기 나의 병명을 친절하지 않게 커밍아웃해 버렸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그렇다.

남편이 10여년간 의심 추적 관찰해 온 나의 병명은 ADHD이다.

Attention-deficit/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 장애.

굳이 말하자면 '과잉행동'쪽은 아니고 '주의력결핍' 쪽이다. 이 나이에 과잉행동이 있긴 쉽지 않다. 기운도 딸리는데. 어릴 적에는 '과잉행동'도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첫 책 '안녕 나의 한옥집'을 읽은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온갖 사건에 사건은 다 일으켰던 말괄량이 시절 이야기)


이런 의심들. 이런 대화들. 이런 염려들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는 건 회피하는 것일까? 왜 병원에 가지 않고, 또 만약에 '약처방'을 받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먹거나 내 아이에게 먹이진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는 것일까? 병원에 갈 정도로, 약을 먹일 정도로 '심한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 누구에게나 ADHD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내 아이에게, 나에게 있다고 인정하기는 어려운 건 왜일까? 왜 우리는 누구나 ADHD라는 병 앞에서는 '웬만하면 그냥 살지'하고 반응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 모든 질문을 뒤로 하고


- 나는 왜 스스로가 ADHD라고 생각했는가?

- 나는 왜 알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고 10여년을 버텨왔는가?

- 나는 왜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가?

- 그리고 지금. 나는 왜. 약을 먹기 시작했는가?

- 그리고 나의 삶은 약을 먹기 전과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다른 사람 얘긴 집어치우고.

일단 가장 중요한 질문은 위의 것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도 이것이다.

 

나.

나의 이야기.

나와 남편의 이야기.

나와 내 가정의 이야기.

나 자신의 이야기.

어쩌면 나와 남편과 ADHD의 이야기.


나는 이 글을 통해 나의 아주 오랜 ADHD역사를 되짚어보고 운명적으로 정신과 의사를 남편으로 만나 바로 오늘 내 입에 이 약을 털어넣기까지의 과정을 '추적 관찰'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 약과 함께 어떤 삶이 펼쳐질지도 기록을 해 보고자 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나의 <ADHD 역사의 기록>이자 <정신과 의사인 남편과 사는 삶>에 대한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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