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것이 궁금하다
이 글을 쓰니까 댓글에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밤호수님 ADHD인데 어떻게 그렇게 글을 써요?
책도 내시고?
이렇게 긴 글을 집중해서? ADHD아닌것 같아요.
이 질문은 사실 지금까지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ADHD 커밍아웃을 했을 때도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아닌 것 같다고. 어떻게 ADHD가 그렇게 긴 책을 쓰고 리뷰도 막 쓰고 그러냐고.
그래.
가만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긴 하다.
난 결국 ADHD가 아니었던 건가?
(나) 여보. 아무래도 나 ADHD가 아닌가봐. (백만 스물 두번째 번복 중)
(남편) 왜 또?
(나) 사람들이 나더러 ADHD가 어떻게 그렇게 글을 잘 쓰녜. 긴 글을 막 쓰고. 책도 내고. 생각해보니까 난 진짜 글을 쓸 때는 집중도 잘 하고, 머리속에서 조직화도 잘 하는 것 같아.
(남편) 원래 좋아하는 일 할 때는 ADHD도 집중 잘 해
(나)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나는 아주 몰입해서 쓰고, 또 글을 쓰기 전에 머릿속에서 아주 많은 조직화를 해. 글의 처음 가운데 끝을 막 구상하거든. ADHD가 이렇게 조직화를 잘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남편) 흠. 그래. 그건 여보의 강점이지. 글을 쓰는 과정을 잘 해낸다는 것은. ADHD있는 사람들도 다 자신만의 강점이 있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는 대부분의 환자들도 집중을 잘 해.
(나) 하지만 그건 보통 게임이라든가, 그런 재밌는 것들에 해당하는거 아냐? 글쓰기는 고차원의 사고를 필요로 하고 또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잖아. 그런데도 잘 해나간다는 건 adhd가 맞나 싶어
(남편) 글쓰기보다 훨씬 창의적이지 않고, 흥미롭지 않지만, 조직력을 필요로 하는 일들을 생각해봐. 같은 글쓰기라도 하더라도. 예를 들어 당신이 관심이 없는 과학서적을 리뷰한다고 생각해 봐.
(나) 음… 관심없지 않거든. 다만 다른 책들에 비해 관심이 떨어질 뿐이야.
(남편) 아무튼 그렇다고 하면 잘 할 수 있겠어?
(나) 음. 난 그래도 집중해서 잘 읽고 요약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남편) 무시 안해. 그러면 이건 어때? 가계부 쓰기.
두둥….
아뿔싸.
가계부라니.
와. 이건 정말 허를 찔렸다.
가계부쓰기.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이건 생각만으로도 피로하다.
그래 ‘피로하다’는 표현이 가장 맞는 것 같다. 생각만으로 피로한 일.
정말 나에겐 생각만으로도 피로한 일들이 있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일들이 있다. 바로 그 피로한 일들을 나는 미루고 미루고 미룰 때까지 미루다가 빵꾸가 나는 일들이 잦다. 남편이 가계부 이야기를 꺼낼 때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피로해.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
숫자. 자료취합. 정리. 꾸준함.
가계부쓰기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필요한 최고난이도의 레벨 태스크다.
(나) (침묵….)(뭐라고 대꾸할까 고민하는 중)
(남편) (나의 당황을 알아차리고 바로 훅 들어온다) 가계부쓰기는 사실 아주 단순한 일이야. 영수증에 있는 숫자를 옮겨적는 거지. 중요한 건 영수증을 잘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규칙적으로 옮겨적어야 하고.
(나) 요즘 누가 영수증을 모아. 다 카드에 나와있는데!
(남편) 그럼 그렇게 하든가. 그럼 할 수 있겠어?
(나) (다시 침묵… )
(남편) 은행카드 사용내역을 보고 적어도 되지. 그리고 가계부 노트대신 컴퓨터가 편하면 엑셀에 옮겨 적으면 되겠지. 가계부형식으로 된 거 많으니까.
음. 나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마트에 갔을 때 주는 특정 상품에 대한 할인권(여긴 그런게 많다)을 잘 모아갖고 있다가 다음번에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산 상품에 대한 할인권을 주기 때문에 거의 재구매하는 상품이다. 그래서 그걸 사용해 보겠다고 차에다가 보관도 해보고 주머니에도 넣어보고 했지만 미국 온 지 13년 동안 단 한번도 사용에 성공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일단 영수증 모으는건 불가능. 대신 카드사용내역은 은행 앱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오케이다.
문제는 그 다음. 그걸 보고 가계부에 적는 것이다. 또는 엑셀에. 그런데 엑셀은 더 힘들 것 같다. 컴퓨터를 켜면 수많은 할일들이 생각나서 가계부 엑셀을 트는 데까지 가는 길이 멀고도 험할 것 같다. 결국 못 열고 그날이 끝날 것이다.
(나) 가계부에 적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 목록을?
(남편) 일단 적기만 하면 되지. 적어 놓으면 덧셈을 해서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 적은 다음에 리뷰를 해야지.
(나) 아. 그러고보니 신혼초에 나도 써보려고 한두번 시도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이틀 넘기기가 힘들었어. 잘 생각해보면 일단 나는 숫자랑 안 친하고, 꼼꼼하게 다 찾아서 쓰는게 무척 괴롭고, 그걸 꾸준히 해야 한다는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같아. 거기다 리뷰도 해야 하다니! 한마디로 난 가계부는 못 쓰겠다.
(남편)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 해.
(나) 그런데 내가 글은 집중해서 쓰지만 가계부같은 건 힘들다는 게 adhd에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어?
(남편) 핵심이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야. 예를 들어 업무 과제. 등등. 세상엔 좋아하는 일보다 해야하는 일이 훨씬 많거든.
(나) 그럼 adhd가 아닌 사람들은 나처럼 관심이 없는 분야에서도 꽤 잘 해낸다는 거야? 아니면 가계부 쓰기는 특별히 조직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adhd가 못한다는 거야?
(남편) 가계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 없는 분야라도 해야 하는 일이면 집중을 해서 보통 해내지. 잘 하진 못할 수도 있지만.
(나) 나도 만약에 가계부를 꼭 써야만 내가 살아남는다. 그러면 쓸 수 있어.
(남편) ...
그런데 갑자기 생각난다.
오래 전 학교에서 근무할 때,
나는 국어교사로서는 정말 재밌었지만 담임교사 혹은 행정업무담당으로서는 정말 힘들었다.
왜냐면 서류가 너무 많았다.
매일매일
선생님 이 학생 급식 서류가 빠졌어요
선생님 결석계 제출해 주세요
선생님 도서관 결제 서류 어디갔어요
이런 일들이 정말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한번은 담임교사들이 다 서명해야 하는 서류가 1반부터 시작해서 끝반 담임까지 돌아가야 하는데, 6반쯤 된 나에게서 사라졌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서류를 받은 적이 없는데! 그러나 결국 서류는 내 자리에서 나왔다. 그것도 내가 서명한 채로. 지금까지 미스테리다. 어찌된 일일까. 그건 내가 서류업무를 관심이 없고 힘들어 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실수를 반복했던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냥 평범하게 서류제출 같은 것들을 잊지 않고 해내는데 말이다.
과연 나는 가계부를 매일, 혹은 규칙적으로 쓸 수 있을까?
문제는 가계부가 아니라고 했지만 자꾸만 가계부 쓰기 라는 엄청난 태스크가 내 앞에 왔다갔다 한다. 그러면서 앞서 말했듯이 그동안 내가 실수한, 잃어버린, 놓친, 빵꾸난 수많은 서류작업들과 청구서 처리 등이 생각난다. 그냥 쓰기 싫어서가 아니라, 피로해서가 아니라, 정말 정말 정말 힘들 것 같다. 가계부 쓰기는.
(나) 왜 adhd는 좋아하는 것에는 그렇게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모든 것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남편) 가설이 있긴 하지만 확실하게 검증되진 않았어. 중요한 건 좋아하지 않아도 집중을 해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세상에 참 많다는 거지. 그런 일을 할 때 도파민이 잘 분비가 되고 작동을 해야 하는데 adhd환자들은 그게 잘 안되는 거야.
(나) 결국 중요한 게 도파민이구나
(남편) 그런데, 도파민만 중요하냐 하면 그것도 꼭 그렇진 않아. 다른 신경전달 물질도 중요해.
(나) 그래. 그것까지는 알고 싶지 않다.
그래. 얘기하다 보니까 결국 오늘의 결론도 나는 adhd다. 남편의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해보니 나의 과거가 물밀듯이 밀려오며, 내게 힘든 부분이 무엇인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글을 쓸 때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글을 쓸 때는 행복하다는 것이! 그러니 이렇게 adhd에 대한 글을 행복하게 집중해서 쓰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