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의 <문장강화>에 입각하여
벌써 2년차, 5기에 접어드는 에세이 클럽을 이끌어오면서 공통적으로 또는 평균적으로 많이들 어려움을 겪는 부분들을 보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첫머리'와 '마무리'이다. 통계적으로 처음보다 '마무리'에 더 많은 어려움들을 호소한다. 이것은 뭐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도 똑같다. 시작과 끝이 어려운 건 모두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 첫문장과 마무리 문장 가운데 개인적으로 더 힘든 부분이 어디일까요?
라는 질문을 나도 수업중에 던진다. 보통은 반반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글을 읽다보면 마무리를 더 힘들어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작에서 크게 흥미를 끌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시작된 글은 굴러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엉뚱한 마무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읽는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이왕이면 시작도 호기롭고 재밌게, 이왕이면 마무리도 깔끔하게 끝내고 싶은 것은 모든 글을 쓰는 자의 공통적인 바람일텐데 이는 참으로 쉽지가 않다. 누군들 김훈작가처럼 명문장으로 시작을 하고 싶지 않으랴. 누군들 박완서 작가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마무리 문장을 살포시 내려놓고 싶지 않으랴. 그것도 아니면 '김혼비'작가같은 트렌디한 요즘 에세이작가들처럼 통통 튀는 문장으로 포문을 열고 싶지 않을까. 찌릿찌릿하게 눈물나는 마지막 한 방을 날리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일단 욕심은 금물이다. 욕심부리다가 망한 글을 한두번 써본게 아니다. (아. 주로 망하는 것 같다) 비단 나만 그럴까.
첨삭을 할 때도 '첫문장이 아쉬워요' 라든가 '절벽같은 마무리라 깜짝 놀랐어요.' 라고 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요하긴 하지만 사실 첫문장. 마무리의 힘은 그 문장이나 문단 자체를 수정하는 것보다는 '글 전체의 구조'의 힘에서 나올 때가 많다. 말하자면 시작. 마무리를 살짝 수정해서 분위기를 더 좋게 할 수 있는 글은 그 자체로 이미 성공적이다. 글 자체에 문제가 있을 경우 시작과 마무리를 고친다고 글의 틀어진 구조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전체 수정을 가해야 한다.
글을 우리 몸이라고 생각해 보자. 바디프로필을 찍기 위해 몸을 다듬고 싶다면 코어근육부터 단련하지 않던가. 나는 팔에 살이 많으니까 '팔살만 빼고 싶다'든가 '허리 라인'만 잡고 싶다 라는게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전체를 다음으면서 부분을 함께 매만져야 비로소 균형잡힌 라인이 살아난다. 탄탄한 코어를 갖춘 글에서 글의 첫머리나 마무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고치기도 쉽고, 어색한 부분이 있다거나 명문장이 아니더라도 독자가 받아들이기 쉽다. 그래서 골격이 중요하다. 결국 2)3)에서 이야기 나눌 첫머리. 마무리의 이야기도 이의 연장선상이다. 다음 2)에서 상허 이태준 선생이 설명한 '머릿말' 부분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정여울 작가는 <끝까지 쓰는 용기> 책에서 "첫문장을 어떻게 시작하시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 설렘. 호기심. 질문.
이 세가지를 기억한다. 라고.
반면 상허 이태준 선생은 <문장강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너무 덤비지 말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 것이다. 신기하게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게 하면 된다.
너무 덤비지 말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 것이다. 신기하게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게 하면 된다.
어쩌면 <설렘. 호기심. 질문>과 같은 욕심은 최소 중급자 이상에게. '덤비지도, 긴장하지도'말라는 가르침은 초급자 이상에게 필요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초급자 시절에는 오히려 '설렘. 호기심. 질문'과도 같은 호기를 한번 부려보며 첫문장을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될 수 있다. 그 시기를 지나면 굳이 내가 설렘을 주려 하지 않더라도, 호기심을 자아내려 하지 않더라도,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독자를 유도할 수 있는 첫문장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역시 이태준 선생의 다음 말들에 고개를 끄덕인다.
<화가 고흐는, 화포 위에 '무엇'이 깃들기 전에는 붓을 들지 않는다 했다. 종이 위에 쓰려는 것이 확실히 깃들기 전에는 붓을 들지 말 것이다. 쓰려는 요령만 눈에 보인다고 덥썩 쓰기 시작하면 중요한 부분이 처음 몇 줄에서 다 없어져 버린다. 용두사미가 된다. 능히 제목부터 써놓을 수 있도록 글의 전모를 빈 종이 위에 느끼고, 그러고 나서 첫머리를 찾아야 한다. 마음속에 그 글의 전모를 느끼기 전에 붓을 들면 머리가 안 나오고 중간부터 불거지기 쉽다.>
깃들기 전에 붓을 들지 않는다.
글의 전모를 빈 종이 위에 느끼기 전에 쓰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문장이며, 바람직한 자세인가.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했든, 코어를 먼저 단단히 느낀 후에 글을 시작하면 첫머리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생은 '평범하게'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다. 글 전체의 힘이 있으면 시작은 무리없이 저절로 흘러갈테니.
유시민 작가의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 를 다들 읽어보았을 것이다. 명문으로 유명한 이 글은 구치소에서 쓰여졌다. 그랬기에 여유롭게 종이를 놓고 이렇게 저렇게 개요를 짜고 여러번 써보고 할 여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그가 실제로 쓴 시간은 열 네시간 정도이지만, 그 글을 쓰기까지 며칠을 눈을 감고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을 쓴 후에 실제 글을 썼다고 한다. 퇴고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종이에 옮기면서 또다시 글은 수정되고 변화되었겠지만, 이미 온 머리와 마음으로 완성한 글은 자신있게 그 나아갈 방향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가 글 하나를 위해 유시민 작가처럼 미리 머릿속의 작품을 완성한 후 쓸 순 없겠지만 (우리에겐 퇴고가 있다!), 고흐처럼 모든 걸 깃들인 후 작품을 그릴 순 없겠지만(고흐가 아니니까!), 글의 전모를 내 안에 어느 정도 채우기 전에 쓰지 않는 자세는 마땅히 필요한 글쓰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내 안에 채워진 글의 전모가 선명하면 할 수록 글의 첫머리는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마련이다.
전모를 갖추지 않고 백지에서 첫머리를 마주하면 그 어디에서 글을 찔러넣어야 할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글이 잘 흘러나가게 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어디서 시작을 하느냐에 따라 글 전체가 달라질 것임을 쓰는이 자신이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의 전모를 가슴에 품은 뒤에 시작되는 첫머리는 그 어디에서 시작되어도 이미 몸통이 정해져있기에 두려울 게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도 나의 몸통으로 가는 한 관문이 될 뿐이다. 그러니 그저 무난하게 시작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첫문장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쓴 후에 돌아와서 살짝 손보면 될 테니까. 약간의 '설렘. 호기심. 질문'을 뿌려서 말이다.
<글의 최후 1행은 무대를 닫는 막과 같다. 제목의 뜻이 아직 충분히 드러나기 전에 끊어지는 글은 공연 중에 막이 닫힌 연극이요, 종점을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글은 연극은 다 했는데 막이 안 닫히는 추태다. >
-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마지막 문장'이 어렵다는 것과 '마무리'가 어렵다는 것은 약간 다르다. 마지막 문장에서 막힌 것은 여운을 남기는 결정적인 한 문장, 한 마디의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무리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글은 마치 척추측만증이 있는 뼈대와 같이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어진, 방향을 틀어버린 글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중심'이다.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 초심을 잃어버린 탓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 또 이와같이 말한다.
글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몇 가지 원인을 찾는다면
(1) 글의 뜻을 분명히 인식하고 통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 첫번째 이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양까지 갈 것을 분명히 작성하고 나섰으면 거침없이 평양까지 가는 차표를 살 것이요, 평양행을 샀으면 평양이 종점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혹은 '평양에서 부산까지' 이렇게 끝이 똑 떨어져야 될 것이니, 우선 글의 뜻을 분명히 인식해서 문맥의 경로와 한계선을 분명히 가지고 그 곬으로만 몰아나가야 할 것이다. >
라고 덧붙인다.
굳이 서울 평양을 따지지 않더라도, 내가 처음에 '벚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면 마무리 역시 그 안에서 해야 할 것이며, '벚꽃이 아름다운데 그로인해 떠오른 어린시절 기억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역시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면 될 것이다. 벚꽃 얘기를 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벚꽃 얘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벚꽃으로 떠오른 어린시절의 기억 그 자체만 얘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소재를 다루다가 여기저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 에세이다. 박완서작가처럼 하나에서 시작한 이야기로 동네방네 온갖 세계를 다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에세이의 자유로움이다. 그러나 그렇게 전 세계, 별 이야기를 다 돌아다니다가도 내가 처음에 쓰고자 했던 그 주제. 내가 '왜 썼는지'로 다시 돌아오는게 뼈대이자 중심이다. 코어 근육이다. 처음 시작했던 '벚꽃으로 인해 떠오른 어린시절의 슬픔'은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사라지고 마무리는 저기 동해바다 어디쯤에서 끝나버리는 이야기는 바로 뼈대가 흔들려버린 척추측만증의 마무리이다.
여운이 남는 마무리. 강렬한 마지막 문장을 고민하기 전에 내가 제자리로 와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 경로와 한계선'안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 그것이 마무리의 '정도'이다.
(2) 최후의 일선. 생기를 얹는 색다른 빛깔. 신비로운 여운.
뼈대가 잘 잡힌 글, 단단한 마무리. 그 이후에 한 스푼 더 얹을 마무리의 '표현'을 고민한다면 이것을 기억해 보자. 역시 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 얻어온 바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무튼 모든 글의 끝맺음은 다소의 점정 작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 편의 글을 형식으로만 맺을 뿐 아니라 내용으로도 완성하는 최후의 일선이 되는 동시에 번쩍! 하고 그 글 전체에 생기를 끼얹는 색다른 빛깔, 신비로운 여운을 지녔어야 묘를 얻은 끝맺음이라 할 것이다. > - 이태준 '문장강화'
완성을 주는 최후의 일선.
생기를 끼얹는 색다른 빛깔.
신비로운 여운.
<완성. 생기. 여운>
세 가지로 기억하면 좋을 듯 하다. 첫문장의 <질문. 설렘. 호기심>과 같이.
자신의 첫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또는 시작이, 마무리가 맘에 쏙 드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아주아주아주 가끔 맘에 쏙 드는 표현이 나올까? 표현은 고사하고 일단 뼈대에서 흔들려서 척추측만 글만 되지 않아도 다행이다.
일단 글쓰기를 시작하면 그 매력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다신 빠져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달라붙은 수많은 고민거리에 고뇌하기 시작한다. 너도 나도 우리도 다 마찬가지다. 수없이 많은 고민거리들과 자아비판과 자격지심, 거기에 실질적으로 당장 해결이 안되는 글쓰기 고민들.
어쩌겠는가. 각자 알아서 하나씩 풀어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많은 고민들 중에서 특히 시작과 마무리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공부방법을 권하곤 한다.
1)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집 한 권을 선택한다.
2) 제목 - 첫문장 - 끝문장.을 필사한다.
3) 또는, '제목 - 첫문단 - 끝문단'을 필사한다.
4) 또는, 제목과 주제를 적고 문단별로 중심내용을 적어간다.
학창시절에 많이하던 '주제 찾기' '문단의 중심내용 찾기'가 그래서 중요하다. (지겹겠지만) 그렇게 뼈대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짜장면 얘기하던 작가가 유럽여행간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떻게 다시 짜장면으로 돌아오는지. 그 뼈대를 찾다보면 나의 글의 뼈대도 알게 된다. 그리고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쫓다보면 알게 된다. '질문 호기심 설렘' 그리고 '완성 생기 여운'이 어떻게 작가의 문장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지.
우리는 끝없이 망하고 망하지만 망하는 가운데 언젠가 내 글에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비법'들이 녹아들어갈 것을 꿈꾸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