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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Mar 05. 2018

그 많던 형, 누나들은 어디 갔을까.

방의경 <그들>


그곳엔 절름발이가 있었다. 


2000년대 초. 비 오는 신촌의 거리. 리퀘스트가 되는 술집 도어즈(Doors)에 우리는 모였다. 가게에 올라가는 2층 계단에는 밴드 도어즈의 보컬 짐 모리슨(Jim Morrison) 얼굴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아마도 가게 주인이 도어즈의 팬이었겠지.


처음 만난 형, 누나들이 있었다. 내 또래는 없었다. 내가 막내였다. 나이가 가장 많은 형은 한쪽 다리가 불편한 절름발이였다. 그의 다리가 왜 불편한지 묻지 않았다. 아무 상관없었으니까. 우리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도어즈에 모인 사람들은 PC통신 음악 퀴즈 동호회 멤버들이었다. 


음악 퀴즈 동호회.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 세상에서는 운영될 수 없는 동호회다. 질문의 답은 모두 인터넷에 나와있으니깐. 그때만 해도 mp3 한 곡 다운 받으려면 30분이 넘게 걸렸다. 음악 퀴즈 동호회는 한 사람이 게시판에 음악 관련 퀴즈를 올리고 답을 맞히는 사람이 다음 퀴즈를 올렸다. 인터넷의 힘이 아닌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으로 동호회는 운영됐다. 


도어즈에 모인 우리는 한참 맥주를 마시며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 메모지에 각자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했다. 갓 스물을 넘겼던 나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 있던 그룹 데릭 앤 도미노즈(Derek & The Dominos)의 <Layla>를 적었다. 에릭 클랩튼이 비틀즈(Beatles) 멤버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Pattie Boyd)를 사모하며 만든 곡이었다. 형, 누나들은 어린 나에게 이곡을 어떻게 아냐며 신기해했다. 나는 자연스레 에릭 클랩튼과 조지 해리슨, 패티 보이드의 삼각관계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자 절름발이 형은 내게 말했다. 


"너. 이 새끼. 참 예쁘네" 



패티 보이드와 조지 해리슨. 이혼 후 패티는 에릭과 재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은 급속도로 발전했고 PC통신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자연스레 음악 퀴즈방의 형, 누나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비 오던 신촌의 도어즈. 신청곡을 적던 펜과 종이. 턴테이블을 통해 흐르던 음악. 나를 예뻐해 주던 형, 누나들.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절름발이 형. 그곳에는 잊을 수 없는 따뜻함이 있었다.


나이 듦을 실감한다. 살면서 많은 모임에 속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항상 '거의' 막내였다. 내 아래로는 얼마 없었다. PC통신 동호회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을 만났을 때도 나는 거의 막내였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내 나이 위에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아래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어딜 가면 더 이상 막내가 아니다.


가끔 해외토픽에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의 뉴스를 본다. 먼저 오는 것이 먼저 가는 게 자연의 이치라면 당장 오늘 생을 달리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를 사는 사람. 그의 심정은 어떨지 짐작할 수 없다. 그저 외로울까? 두려울까? 아니면 오래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하루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까? 나는 그 나이까지 살아보지도, 그리고 살아갈 수도 없을 거 같아 아마 영원히 그 기분을 느끼기 어렵겠지.  세상 60억 인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 그도 언젠가는 막내의 삶을 살았을 텐데...





음악을 들으면서 "아, 이 가수 범상치 않다!"라고 생각되는 뮤지션이 있다. 이장희, 이정선, 김창기가 내게는 그랬다. 여성 뮤지션 중에서는 방의경 음악이 그랬다. 방의경.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72년 그녀의 앨범이 나왔다. 앨범은 나오자마자 방송 금지가 되고 칼로 찢겨 폐기, 소각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앨범은 희귀했고 비싼 가격에 중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다행히 몇 해전 그녀의 앨범이 CD로 재발매되었고 그제야 나는 온전히 그녀의 앨범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앨범이 폐기됐던 이유가 뭘까. 데모하던 학생들이 그녀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게 이유다. 실제로 그녀가 불렀던 <그들>을 처음 듣던 날 나는 조금 충격을 먹었다. 가사와 노래에서 느껴지는 힘이 범상치 않았으니깐. 그녀가 불렀던 <그들>에 어떤 숨겨진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운동권에서 즐겨 불렀다고 하니 정말 어쩌면 데모하다 붙잡혀 간 오빠, 언니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곡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새 방의경이 부른 <그들>을 들을 때 느끼는 감상은 예의 그 느낌과는 다르다. 나를 막내로서 있게 해주었던 형, 누나들이 그리워지는 노랫말이다. 에릭 클랩튼이 불렀던 <Layla>를 신청하고서 내가 들었던 말.


"너. 이 새끼. 참 예쁘네" 


비 오던 신촌의 술집 도어즈에서. 

나를 예뻐해 주던 그 많던 형, 누나들은 지금 다 어디 갔을까.



방의경 [내노래 모음]

                                                                                                                                                               

방의경  <그들>


나 어릴 때 친구 해주던 그 언니 어데 갔오
나 슬플 때 달래주던 그 오빠도 가는 구려

언제 까지나 기다려야 그들이 돌아올까 
다른 사람 나를 보고 꿈꾼다 하지만
그리움 달래는 이 내 마음을 어느 누가 알리오

예쁜 꽃핀 사다 주며 내 볼을 튕겨 주었고 
장난감 사다 주며 나를 안아 주었지만

이제는 밤길을 혼자 거닐며 외로움을 가져 봤지만
그들의  영원한 행복한 사랑을 나 어찌 빌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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