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을 바라지 마라 - 일본에서 영어로 일하기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1

by 남듄

'요행을 바라지 마라'는 글귀를 3장의 포스트잇에 적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현관문, 책상 앞, 침대 옆 벽에 붙였다. 포스트잇을 붙일 당시에는 결의에 차 있었기 때문에 매일 포스트잇을 보며 '요행을 바라지 말고 열심히 해야지'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포스트잇이 인테리어 소품처럼 익숙해져 눈길을 잘 주지 않게 되었다.


뭘 그렇게 대단한 걸 하길래 거창한 글귀를 적어뒀나 싶을 텐데, 내가 힘내고 싶었던 건 '영어'다.


나는 현재 2년 반 동안 일본에서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일본에서 영어를 쓰며 일하고 있다. 여전히 영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도 외국계 회사에 들어왔구나 싶다.


더욱 절망적 이게도 당시의 매니저가 일본어를 모르는 인도인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기본적인 일본어는 알지만 귀찮아서 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나는 영어를 공부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만난 멘토도 영어를 썼고, 또 그 뒤 만난 동료도 영어를 썼다. 이 회사에서는 누구를 만나던 영어를 썼기 때문에 내가 영어를 배워야 했다. 바디랭귀지나 느낌으로 대화한다거나 그런 어영부영하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나는 영어가 메인이 아닌 IT 지식을 메인으로 배워야 했다. 더 중요한 건 영어보다는 IT 지식이었다. 영어는 도구에 불과했고, 나는 그 도구가 빈약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빈약한 도구로 (당시 내게는) 하드한 트레이닝을 거쳤다. 수료해야 하는 '영어로 된' 인터넷 강의도 많았고, 이를 바탕으로 홈페이지를 구현해야 했다.


해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트레이닝을 끝냈다. 3달 동안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했고, 스트레스 때문에 위염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강의를 대부분 수료했고, 어려웠지만 홈페이지도 구현했다. 기쁘고 뿌듯했다. 멘토로부터 칭찬도 받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그렇게 트레이닝이 끝난 뒤, 새로운 동료가 회사에 입사했다. 이 동료도 내가 받은 트레이닝을 받아야 했고, 내가 그 동료를 서포트하게 되었다. 나도 힘들었으니 이 사람도 힘들지 않을까. 힘들겠지. 그러면 내가 도와줘야지. 기세등등하게 있었다.


그리고 그 동료는 내가 3달 동안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완수한 트레이닝을 한 달 반 만에 끝냈다. 글을 쓰기 위해 과장되게 기간을 줄인 게 아니다.


알고 보니 동료는 일찍이 유럽에서 유학을 했다고 했다. 4개 국어가 가능했고 특히 영어를 굉장히 잘했다. 내가 영어가 이해가 가지 않아 두 번 세 번 보았던 인터넷 강의를 한 번만 보고 이해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매우 절망적이었다.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영어를 잘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과 같은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문득 어릴 적부터 해외에서 유학을 한 사람과 국내에서 평범하게 자란 나를 비교하는 것은 치사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동료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과정을 어릴 때 했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고 부끄러운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렸을 때 언어를 배우는 게 언어 능력 습득에 더 효과적이라고 하던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유년 시절의 해외 생활은 성인의 경험보다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정체성 문제에 빠졌을지도 모르고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힘든 경험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을 하니 동료와 나를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비교하는 자체가 치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어 수업을 시작했다. 매일 영어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요행을 바라지 마라'는 글귀를 포스트잇에 적어 눈에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책상 앞과 현관 그리고 침대 옆. 날짜도 적었다. 이 포스트잇을 붙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영어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매일 25분간 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매일 25분간 수업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피곤해서, 어느 날은 지루해서, 가끔은 그냥 듣기 싫을 때도 있다. 놀고 싶다. 그럼에도 2년 동안 거의 매일 영어 수업을 들었다. 이제는 양치를 하는 게 당연하듯 매일 영어 수업을 듣는 게 당연해졌다. 당연히 실력은 꽤나 늘었다. 잘한다는 건 아니다.


최근 방 청소를 하며 가구를 옮기는 일이 있었고, 이때 글귀를 적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2년 간 노력했구나. 포기하지 않았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영어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영어 실력은 형편없지만 영어를 쓰는 게 익숙해졌다. 기쁜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일본어를 잘 쓰지 않으니 한자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회화도 어려워졌다. 2년 동안 일본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 당연하다. 다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일본어 공부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믿고 계속 노력할 것이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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